1주년 15

여름밤의 별하늘

“여름철의 대삼각형은 알타이르와 베가, 데네브…….” 찜통이 된 교실 안에 무미건조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퍼졌다. 꼭 수면제를 탄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무더위에 지친 학생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수십여 분이 지나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멀쩡히 앉아 있는 학생이 드물 지경이었다. 그 멀쩡한 학생들 중 하나가 바로 쇼우네이였다. 사실 쇼우네이가 지구과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별자리 이야기를 유심히 들은 건 단 하나, 그의 연인인 시라유키 미노루 때문이었다. 밤 산책을 즐기는 쇼우네이와 달리 미노루는 어째서인지 밤을 유독 거북해했다. 쇼우네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지만 그가 어둡고 광활한 밤하늘을 시각적으로 두려..

1주년 2022.08.22

다시 한 번 하굣길

아카츠키 쇼우네이와 시라유키 미노루가 연인으로서 만남을 가진 지 일 년이 가까워 왔다. 둘의 일 년은 한마디로 갈등과 합의의 연속이었다.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둘이 기적적으로 강한 끌림을 느껴 맺은 관계인 만큼 안정되는 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이를테면 둘은 삶의 속도부터 달랐다. 물리적인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마음의 속도까지도 그랬다. 쇼우네이는 매사에 빠른 편이었고 미노루는 쇼우네이에 비해 처졌다. 연인과 발맞춰 걷고 싶었던 미노루는 늘 시라유키 교통법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저보다 앞서 가는 쇼우네이를 붙잡곤 했다. 그러나 뒤이어 이야기할 문제에 비하면 물리적인 속도 따위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쇼우네이는 무슨 일이든 간에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것을 편안해했다. 마음을 표출하는 것도, 정리..

1주년 2022.08.22

밤의 화원

꽃의 진가는 색에만 있지 않다. 봄철의 아키타와는 형형색색의 예쁜 꽃이 곳곳에 피어 발길을 끌곤 했다. 눈이 녹아 흐르고 어느덧 개화 시기가 되면 소소하게나마 관광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꽃들이 햇빛을 받아 자태를 한껏 뽐내는 낮 시간에는 섬 전체가 외부인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활기 넘치는 한편으로는 어수선하고 부산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밤 시간이 되면 너른 꽃밭을 메우던 발길이 뚝 끊겼다. 관광객들은 해가 지고 꽃들이 빛을 잃기 전에 서둘러 배를 타고 섬 밖으로 떠나 버렸다. 다음날의 해가 뜨기 전까지는 섬 전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곤 했다. 그 때부터는 오롯이 아키타와 주민들의 시간이었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유독 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아카츠키 ..

1주년 2022.08.22

영화 연작 - 2

미노루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쇼우네이와 함께 영화관에 간 적이야 몇 번쯤 있다지만 영화를 보려고 갔다기보다는 딴마음을 품고 간 것이기 때문에 번번이 허무하게 표 값을 날리고 오기 일쑤였다. 비록 어느 순간부터는 쇼우네이 또한 미노루의 흑심을 눈치챘지만 그 이후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그 뒤로도 둘은 종종 영화관에 갔다. 둘 중 누구도 “영화 따위는 됐으니 어두운 곳에 같이 앉아서 스킨십이나 하자”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던 둘이 영화관을 가지 않기 시작한 것은 봄쯤이나 되고서였다. 영화 따위보다 너와 몸을 붙이고 있는 게 좋다는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평소에도 서로에게 닿아 있는 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여전히 조금..

1주년 2022.08.22

2021.09.25 일기

9.25 아카츠키 쇼우네이 날씨: 맑음! 기분: 최고! 다행히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젯밤에 기를 쓰고 일찍 잠에 들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덕분에 일찍 차려입고, 가는 길을 여러번 확인하고, 열시 반 쯤에 그 녀석 집 앞에 도착해서 웬일로 일찍 나왔냐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던데, 내가 먼저 나올거라곤 생각도 못 한 모양이지. 쌤통이다. 잔뜩 키득거리며 손을 내미니 아무렇지 않게 잡아오는데, 어제부터 걱정이 앞섰던 건지 잡은 손에 묘하게 힘이 없었다. 몸이 안 좋은거면 무리하지 말자고 하니 예상 외로 긴장되어서 그런거라는 솔직한 대답을 들어서 놀랐다. ...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한 말이겠지 싶어서 선착장까지는 아..

1주년 2022.08.21

2021.09.16~2021.09.18 일기

9.16 시라유키 미노루 날씨: 맑음 기분: 복잡함 쇼우네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법이 없다. 어제는 갑자기 학교 밖에서 보지 말자더니 다짜고짜 목욕탕으로 찾아와서는 사과를 하고(왜 미안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평소처럼 다시 만나자더니 오늘은 또... 생각할수록 골치 아프다. 왜 우리 사이는 이리도 순탄하지 않은 건지. 어쩌다 보니 녀석과 다툼 비슷한 것을 하고는 또 흐지부지 화해해 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점심 즈음의 대화였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 일주일 동안 뽀뽀를 못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뭐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나온 거다. 그러다 질문의 화살이 내게 향했는데,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질문이라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지 쇼우네이가 듣고 있다는 게 ..

1주년 2022.08.21

화이트데이

삼 월 십사 일은 연인들의 날이다. 연인들의 날인 한편으로는 지난 빼빼로 데이와는 달리 쇼우네이에게 건네 줄 초콜릿을 제대로 준비한 미노루를 위한 날이기도 했다. 화이트데이를 맞아 초콜릿을 사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들어간 가게에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다행이었다. 조금 비싼 초콜릿을 권해 받은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알고도 놀아나는 상술이었다. 통장에는 매장에 있는 초콜릿을 전부 사고도 남을 돈이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고급 초콜릿을 사 점원의 포장까지 받아 온 참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늘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건만. 어째 쇼우네이와 만나고부터는 곧바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화이트데이 전날에도 그랬다. 다음 날 이 초콜릿을 어떻게 건네 줘야 놀림받지..

1주년 2022.08.21

꿈 연작 - 2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고 잠든 지 몇 달이 지났다. 그 때 감기에 호되게 걸려 결석까지 한 뒤로 날이 완전히 풀리기까지 창문을 열지 않기로 했건만. 창문을 열지 않은 날부터 미노루는 밤마다 쇼우네이가 그리워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곤 했다. 그런 상태였으니 당분간은 창문을 열지 않겠다는 몇 달 전의 결심이 쉽게 무뎌지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날이 채 따뜻해지기도 전인 삼 월 말경에 다시 창문을 열었다. 봄이 완연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한 시기였다. 방 창문으로 바로 보이는 벚나무도 봉오리를 몇 개 맺었을 뿐, 미처 꽃을 틔우기도 전이었다. 창문을 열자 여전히 찬 밤바람에 흔들리는 벚꽃 봉오리들이 옅은 향을 내며 미노루를 간질였다. 그 모습이 마음을 어지러이 흩어 둘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또다시 새벽 ..

1주년 2022.08.21

새해 첫 날

새해 첫 날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때는 이미 아홉 시였다. 눈을 뜨자 이미 창문 틈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기에는 너무 충분히 잤다. 시원하게 기지개나 한 번 켠 미노루가 옆에 누운 쇼우네이 쪽을 내려다보았다. 쇼우네이는 여전히 꿈나라 여행 중인 듯 미동도 없었다. 쇼우네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전날 밤 생각이 났다. 둘 다 새해 첫 여행을 너무나 기대한 나머지 의견이 충돌해 싸움까지 났었던 밤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물론 새해가 오기 몇 분 전에 극적으로 잘 풀었지만 쇼우네이의 얼굴을 다시 보니 어쩐지 조금 얄미운 마음이 들어 곤히 자고 있는 볼을 쿡 찌르자 짜증 섞인 잠투정이 돌아왔다...

1주년 2022.08.21

첫 키스

약 이 주만의 데이트였지만 쇼우네이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푹푹 쉬어댈 만큼이나 심란했다. 정작 나란히 걷던 미노루 -문제의 원흉- 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성탄절 장식물에 감탄하고만 있었다. 성탄 전야를 맞아 온 거리가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모두 하나같이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퍽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늘상 표정이 거기서 거기인 미노루조차도 풀어진 얼굴로 실실 웃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 가운데,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잔뜩 골이 난 사람은 사람은 쇼우네이뿐일 터였다. 본디 종교 지도자의 탄생을 축하하던 성탄절은 어느샌가부터 연인들의 날로 변모했다. 성탄절 바람이 코끝을 스치기 시작할 때부터 온갖 미..

1주년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