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2021.09.16~2021.09.18 일기

이가미 2022. 8. 21. 23:02

9.16 시라유키 미노루

날씨: 맑음   기분: 복잡함

 쇼우네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법이 없다. 어제는 갑자기 학교 밖에서 보지 말자더니 다짜고짜 목욕탕으로 찾아와서는 사과를 하고(왜 미안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평소처럼 다시 만나자더니 오늘은 또... 생각할수록 골치 아프다. 왜 우리 사이는 이리도 순탄하지 않은 건지. 어쩌다 보니 녀석과 다툼 비슷한 것을 하고는 또 흐지부지 화해해 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점심 즈음의 대화였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 일주일 동안 뽀뽀를 못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뭐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나온 거다. 그러다 질문의 화살이 내게 향했는데,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질문이라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지 쇼우네이가 듣고 있다는 게 신경이 쓰여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넘겨 버리질 못하겠고... 결국 진심을 반 정도만 담은 엉성하기 그지없는 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쇼우네이 녀석이 사실은 제가 내게 그... 뽀뽀를 해 주길 바라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게 왜 그렇게 되냐고 팩 쏘아붙였던 것 같다. 솔직히, 진짜 솔직히 싫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녀석에게는 말 못 했지만 사실 나도 조금쯤 하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평소에는 늘 제멋대로 뻔뻔스레 행동하더니 진짜 제멋대로 좀 해 줬으면 싶을 때는 주춤해 버리고, 겁쟁이 같으니. 그래서 결국 싫은 게 아니라고 겨우 말했는데, 그쯤 되면 눈치 좀 챌 것이지. 결국 끝까지 추궁하길래 하는 수 없이 해 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게 솔직한 마음인 걸 뭐 어쩌겠는가. 이걸 쓰면서도 나 스스로가 이상하지만, 이제 와서 부정하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겨우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웬걸, 결국 여기까지 말하게 시키는 거냐고 했더니 또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거다. 거기까지도 어떻게 참을 수는 있었는데,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녀석은 밤에 목욕탕에도 안 찾아오고 학교에서도 모른 척하겠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내가 녀석에게 약하다는 것을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겠지. 사실은 녀석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또 반기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다시 평소대로 만나자던 어제의 말을 순식간에 깨 버리고 나를 뒤흔드는 것이겠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꼼짝 못 하는 걸 알면서 꺼낸      말일 거다. 그리 생각하니 기가 차서 녀석에게 일단 대화를 멈추가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더니 나중에 돌아왔을 때는 안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의 말을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낮추고 사과 비슷한 것을 해 버렸다. 그랬더니 도리어 제가 사과를 해서... 나도 그냥 적당히 넘어갔던 것 같다.

 사실 그 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밤에도 안 올 거라느니 학교에서도 모른 척할 거라느니,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재미있는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면서 전전긍긍하는 내 반응을 보는 게 그리도 좋은지. 그 말을 꺼내면 우리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차마 말 못 하고 상황을 끊어낸 건데, 지금에 와선 잘한 선택이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오늘은 넘겼지만 아마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은 이어질 거다. 녀석은 내가 꼼짝 못할 말을 하며 나를 시험하고, 나는 필요한 말을 참아가며 녀석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겠지. 그것으로 당분간은 이 관계가 유지될 거다. 그래도 솔직히 조금, 아주 조금 두렵다. 꺼내지 않은 채 쌓아 둔 말들이 실금 같은 균열을 일으킬까 봐. 그 균열이 점점 벌어지고, 또 점점 깊어져 나중에는 녀석이 곁에 있어도 한없이 멀리 있는 기분이 들까 봐. 얼마 전엔가, 손님 둘이 하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그 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거라면 얼마나 더 이어갈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언젠가는 무뎌지려나, 아니면 버티지 못하고 내가 먼저... 끝을 고하게 되려나. 지금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게 남아 있는 한 조각의 자존심이 원망스럽다.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안 되면서도 이리도 사람을 괴롭게 하다니. 뽀뽀를 해 달라고 직접 말했을 때, 꼭 해야 했을지도 모를 말을 참았을 때, 녀석과... 헤어지게 될까 봐 먼저 자세를 낮춰야 했을 때 이 알량한 자존심은 몇 번이고 찢겨나갔다. 뜯겨나갈 자존심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늘 밤에도 오겠다던 녀석은 결국 오지 않았다. 녀석이 온대서 조금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잘 됐다. 지금 이런 상태로 녀석을 보면 나도 모르게 온갖 말을 쏟아낼 것 같으니. 돌이키지 못할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녀석을 만나면 좋은 말은 안 나갈 것 같으니 당분간은 자주 마주치지 말아야지. 당장 학교에서는 어찌해야 하나 싶지만. 아마 녀석을 찾아가지도, 마주하지도 않는 건 내 쪽이 될 것 같다.

 

9.16 아카츠키 쇼우네이

날씨: 하늘이 예뻤음   기분: ...그다지

 ...원래대로 돌아오려고 마음먹은지 하루만에 망쳐버리는 실력이 대단하다. 내가 보통놈이 아니란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좀 가만히 있어주면 어디가 덧나냐? ...나에게 하는 소리다. 날씨도 좋고, 또 아침에 같이 등교하면서 영양성분이나 맞춰서 먹으라고 잔소리좀 하고. 선심까지 써서 이거 먹고 키 좀 크라면서 문어완자까지 두 알 사줬는데. 그리고 어제 내 말을 잊지 않았다는 듯 심하게 나무라지도 않으며 같이 등교할 때 까지만 해도 괜찮은 하루라고 적혔을 테지만...모르겠다. 내가 심한 말을 했던게 맞긴 하지만, 그래도 심한 말을 하게 만든 원인한테 이런 소리를 듣게 된 것 일 때문에 여러모로 심란하다.

 점심시간에 시간 있냐면서 또 옥상에 올라가서 먹을까, 하고 도시락을 챙겨서 가는 도중에 다른 반 애들의 러브라인이라도 있었는지 일주일동안 안 만났다가 다시 붙었더니 사이가 두배로 좋아졌다더라~ 같은 말을 들었던 것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귀를 막고 걸어갈걸. 그걸 듣고 재미있어 보이길래 일주일동안 못 만나는건 어떠냐-에서 부터 시작해서 그게 안된다면 스킨십쪽으론 어떠냐고 다시금 물어봤는데, 뭐랄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가만히 내 말만 듣다가 적당히 대답만 하고 얼버무리려 하는 것 같은 모양새길래, 나도 모르게 또 장난을 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거의 의미없이 던져본 말이었는데도 상당히 불쾌했는지 험상궂은 얼굴로 단답하는 그 녀석의 행동에 주춤해버리고 말았다. 싫다고는 안 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그건 좋다는 의미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이런 말까지 해버리면 안달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냥, 무시하려 했다. 정말로! 그렇지만 정신차리고 보니 잔뜩 언성을 높이고 싸우고 말았다. 뭐였었나.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드냐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녀석이 바라는 대로 그대로 봐주기를 위해서 열심히 물어보고, 싫어할만한 짓을 피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녀석은 자기가 말했던 것을 잊어버린 모양인지 내가 한 말을 모조리 곡해해서 들어버리고 만다. 결국 그냥 오늘부터 모르는 체 하자며 몇마디 쏘아붙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차라리 그게 낫겠다면서 저녁에는 찾아오겠다고 하는거다. 그래놓고 바로 등을 돌려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순간부터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다 아는 양 굴면서도 이럴 때는 하나도 모른다는 듯이 빠르게 내게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며......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과...해야겠지...싶어서 결국 하교시간에 찾아가서 사과하고는, 그대로 나도 등을 돌려서 빠르게 집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 내 얼굴도 보기 싫을 것 같으니까 그냥...앞으로는 노력껏 피해다녀야겠다. 어쩌면 그 녀석도 이걸 바라고 있을지 모르고.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오늘 밤에는 어떻게 집에 돌아가려고, 같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같이 다닌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쉬운 기분이 들지...잠시 꺼뒀던 아침 알림을 다시 켜고, 고양이 인형도 옷장에 넣고. 그랬는데도 계속해서 생각이 나서 심란하다. 어차피 다 망했는데, 아니... 이번엔 진짜로 망했구나. 더 이상 망했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테니. 이것도 다 쓰면 옷장에 넣어둬야지. 그리고... 모르는 척이나 연습해둘까.

......처음으로 등교를 하지 말아볼까.

 

9.17 시라유키 미노루

날씨: 맑음    기분: 모르겠음

 오늘 쇼우네이가 등교하지 않았다. 어제 녀석과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후로 당분간 가까이하지 않기로 했던 차에 마침 잘 됐다. 어젯밤 내내 오늘 녀석을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게 좀 허무해지기는 했지만서도 괜히 더 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은 사라졌으니. 그건 그렇고, 학교에 녀석이 없는 것 말고는 전부 평소와 같은데 왜 이리도 낯선지. 학교가 이토록 조용하고 평온한 곳인 줄 처음 알았다. 잠을 자는데 괜히 깨우는 사람도, 자판기에서 이상한 것을 뽑았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다니. 여러 아이들이 웅성이는 가운데 내 옆은 놀라우리만치 고요해서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을 때쯤, 녀석이 등교하지 않은 이유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연주회 일정은 지난주에 이미 소화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지. 몸이 아프거나, 아니면... 녀석 역시 나를 피하고 있거나.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좀 더 높을 거다. 생각할수록 최악의 결과만 떠오른다. 이대로 계속 서로를 피하다 시간이 흘러 서로를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해지려나. 서로가 없는 풍경에 익숙해져 결국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레 깨어지게 되려나.

녀석과의 거리를 조금 좁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하다. 이대로 내가 녀석에게 한 발 다가가 지금의 관계를 유지한대도 그게 꼭 좋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도 나는 내가 녀석에게 한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들키고 녀석에게 다시 끌려다니겠지. 이제까지보다 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말 분하지만 녀석이 없으면 안 되는 건 내 쪽이다. 그러니까... 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일단 지금은 덮기로 했다. 녀석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면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 마주치지 않겠다는 방침은 유지하는 쪽으로.

 결국 오늘은 녀석에게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어 두기로 했다. 일이 끝난 후에 녀석의 집 앞에 들러 편지를 넣고 와야지. 그리 결심하고는 편지를 한 통 써 두었다. 오늘 안 온 걸 보니 아픈 것 같던데 몸은 괜찮은지... 뭐, 그런 걸 물었다. 아파서 안 온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나를 피하는 거냐고 말하기는 껄끄러우니까. 명목 상으로는 병문안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와 함께 현관 앞에 둘 죽도 사 두었다. 바로 만든 걸 사면 좋겠지만 일이 끝난 뒤면 죽집은 문을닫을 테니 미리 사 놓은 거다. 전에 내가 만들었던 것보다 보기에도, 냄새도 훨씬 훌륭하다는 사실에 괜스레 조금 씁쓸해진다.

어찌됐든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좋아지기를. 부디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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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우네이, 오늘은 학교에 안 왔네. 네가 이유 없이 결석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몸이 많이 아픈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어. 생각해 보면 요즘 네가 많이 혹사했을 것도 같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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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 시라유키 미노루로부터 아카츠키 쇼우네이에게

 

 

9.18 아카츠키 쇼우네이

날씨: 맑음       기분: 좋아짐

 어제 나갔어야 했는데, 아침에 모처럼 일어나기 싫어서 꾸물텅대던걸 어머니께 들켜버린 관계로 하루종일 꼼짝없이 갇혀있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밤에 찾아가서 다시금 사과하고, 또... 다시는 그런말 안 하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조금 아프다고 핑계를 댔더니 나도 모르는사이에 어머니께서 현장자율학습을 하루치 승인받아온 관계로 하루종일 꼼짝없이 바깥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을 말해봤자 핑계로밖에 느껴지지 않겠지 싶다. 조금만 더 일찍 어떻게든 미안하다고 말할걸, 어제 그 녀석에게서 온 편지를 오늘에서야 제대로 꺼내보게 되었는데, 읽을수록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 줄씩 읽을 때 마다 눈물이 흘러서 제대로 읽지 못하겠어서 오늘로 미룬 것이 후회스럽다. 차라리 나무라거나 더이상 보기 싫다고 하지, 어째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나는 사과를 받는것마저 두려워서 도피하던 사람인데, 아직까지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답지 않게 꾹꾹 눌러 쓴 글씨가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녀석에게 미안해서겠지, 평소와는 어떻게 다르게 말해야 할지부터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아파서 쉰게 아니라는 말을 꺼내려면 내가 녀석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꾀병을 부렸다는 것을말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분명히 왜 피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이유로 그 녀석에게 상처를 줄게 분명하다. 이래서였을까, 자길 좀 더 제대로 봐달라고 말 했던 이유가 이제서야 분명해진 느낌이다. 나는...아마도 미노루 녀석을 곡해하고 있었겠지. 편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그 녀석이 나를 싫어하고 보고싶지도 않아할 것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바로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나오면서 전화를 걸긴 했는데, 착신음이 걸리자마자 무서워져서 끊어버렸다. 뭐하는 애인가 싶겠지.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내 하루를 한순간의 말실수로 얽혀버리게 만들고는 제대로된 생각도 못한 상태에서 변명이나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전화해도 내가 찾아갈거라고 생각했겠지. 요즘들어 연락하던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같은 생각을 했더니 금방 도착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새 수척해진 느낌이라서 나 없는동안 밥은 잘 먹긴 했냐고 농담조로 말했더니 여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해서, 결국 나답지 않게 무게를 잡아 버리고 말았다. 나름 생각을 했음에도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그 녀석이라면 알아서 잘 해석하겠지 싶은 믿음이 있는 관계로. 편지는 잘 읽었다고 말했더니 눈에 띄게 놀라는 모습이면서도 얼굴만큼은 평온 그 자체라서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 말에 들어줄 생각이 생겼는지 일단 앉아서 말해보라며 정리하던걸 내려놓길래 나도 숨을 좀 고르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뭐부터였나, 네가 아직 날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걸 이해한다는 거였던가... 아니면 화가 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싸울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 부터였나... 그렇게 말을 시작하다보니 나중에는 별 말을 다 했던 것 같다. 다시는 이런식으로 협박하지 않을게 라던가, 이 일 때문에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던가, ...쓰기는 부끄럽지만 너랑 헤어지는걸 생각하기조차 무서워서 울게된다던가 같은 유치한 말이나 잔뜩 내뱉고는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그 녀석도 완전히 이해한 눈치는 아니지만 앞에 사람이 울어서인지 일단 안고 토닥여주던데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어쨌든, 말은 다 들어줘서 다행이지만.

그 때 조금만 더 생각할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더 제대로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다. 나야말로 네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던가, 마음같은거 표현 안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던가, 이렇게 심하게 싸우고 싶지는 않았고 또 내 말을 그렇게 이해했을줄도 몰랐다는거라던가, ...네가 나쁜게 아니라 내가 나쁜 성격이라서 널 힘들게 만든거라던가. 그리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대답버튼마냥 사용하지 않겠다는, 그런 미리 생각해간 말들은 반절도 채 남지 않은 채 산화해버려서 결국은 또 다시 멍청한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징징거린 탓인지, 덕분인지 오늘은 내가 말했던대로 원래대로! 손을 잡고 돌아가게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긴 했지만.

 걔네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아침에 연락해주면 안되냐고 물어봤지만... 대답은 못 듣고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거북하긴 하겠지, 그래도 아직 나를 싫어하진 않는 것 같으니 자주 찾아가야겠다. 이것마저도 싫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피해줘야지. 내일은 학원도 안나가는 날이니 밤에 목욕탕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쫓겨나지는 않도록.

 

9.18 시라유키 미노루

날씨: 맑음     기분: 편안함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꽤나 멍청한 짓을 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건강한 모습으로 등교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남기다니. 오늘은 토요일인데. 그래도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어제 편지를 전해 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오면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나. 싸움 비슷한 것을 한 지 이틀이 흘렀음에도 그 말만은 유독 머릿속에 선명히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어느 정도 정신도 차려지고 머릿속도 조금 맑아졌는데 왜 그 한 마디는 무뎌질 생각을 않았던 건지. 그래도 뭐, 일단 너무 늦지 않도록 편지를 보내 놓기도 했고, 다음 일정도 있었으니 괜히 머릿속을 빙빙 도는 것들을 떨쳐내고 밖으로 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은 주말이었고, 주중에 나를 괴롭히던 문제에서 잠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오늘 함께 산에 오르던 란으로부터 한 소리를 들어 버렸다. 분명 산행에 집중해야 할 텐데도 나중에 오면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을 내뱉던 녀석의 표정과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서, 그만 몇 년을 다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산길에서 발을 헛딛고 말았다. 왠지 평소보다 멍하던 내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란이 타이밍 좋게 잡아 줘서 큰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제법 아찔한 상황이었나 보다. 정작 나는 정신이 어지러워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랐지만. 괜히 란을 걱정시켰다는 생각에 사과하고 다시 정상을 향해 가려는데, 란이 나를 멈춰 세우더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고 하는 거다. 그에 더해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산에 오른 이상 방심하면 안 된다면서 오늘 이상해 보이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도 물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란에게 어떻게 말하겠는가. 잠시 침묵을 지켰더니 란이 당장 말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털어놓으라고 해 주었다. 상냥한 녀석. 어쩐지 요즘 계속 쇼우네이 생각만 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내 곁에 남은 사람이 쇼우네이만은 아닐 거다. 란의 말에 그 사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무튼 란 덕에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나니 이틀 간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제법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잠이 쏟아져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다섯 시간쯤 잤을까, 일어나 연락 온 게 없는지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려는데, 일어나자마자 휴대전화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누구 때문에 생겼는지 떠올라 괜히 씁쓸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고 정말로 연락을 확인했더니 두 건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하나는 아빠로부터고(아마 목욕탕 일손이 잠시 부족했던 것이겠지) 다른 하나는... 쇼우네이로부터였다. 녀석과의 연락이 끊기길 바란 건 아니지만 자고 일어나자마자 맞닥뜨리기에는 제법 당황스러워서 녀석에게 회신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아빠에게 전화를 건 뒤 목욕탕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 쇼우네이 녀석이 직접 찾아온 거다. 어제 하루 못 봤다고 마주치자마자 마음이 흔들리다니, 나도 참 중증인가 보다. 게다가 어쩐지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아 보여서, 가볍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녀석에게 몸은 좀 괜찮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녀석의 분위기가 변하더니... 그 다음은 뭐라 써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녀석의 말을 듣고 나 역시도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는 것만큼은. 녀석 역시 여러가지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결정적으로 다시는 협박 비슷한 걸로 마음을 쥐고 흔들지 않겠다든가, 헤어지는 건 생각만 해도 무섭다든가...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어 버려서 어쩐지 조금 편안해졌다. 겨우겨우 한두 마디씩 꺼내놓으며 울음을 터뜨리길래 안고 토닥여 달래 주었던 것도 같다. 내게 안긴 녀석이 훌쩍이며 몸을 떠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괜히 나까지도 마음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이틀 간 납덩이를 얹은 듯 무겁게 욱신거리기만 했던 마음이 다시금 조여 오는 듯한 느낌에 나 역시도 울음을 터뜨려 버리면 속이 시원하려나,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까지 울기 시작하면 울음바다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 같아 그저 가슴을 옥죄는 듯한 통증을 가라앉히고 녀석을 계속 토닥이는 쪽을 택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분명 어제와 그저께 나를 괴롭히던 것과 같은 아픔은 아니었으니. 분명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풀리면서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중일 테다. 이 아픔 역시 그 일부겠지. 그리 생각하고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웃으면서 달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느라 엉망이 된 녀석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지만. 하여간, 마음 한 번 여려서는.

 돌아가는 길에는 녀석이 평소처럼 손을 잡아 주었다. 그 투박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왜 이토록 안심이 되는지. 거의 집 앞에 다 와 갈 때쯤 녀석이 아침에 전화를 해 주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솔직히 녀석이 피곤했던 건 진짜일 것 같아 주저되는 마음에 대답을 들려 주지 못하고 들어가 버렸다. 뭐라도 말해 줄 걸 그랬나.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는 또 있을 테니. 녀석과 다시 가까워진 김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내일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 볼까. 내일은 쉬는 날이니 엄마에게 급히 배워서 뭐라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메뉴는 전골이 좋겠다. 함께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마주앉아 재료를 건져 먹으면 잠시 멀어졌던 마음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질 것 같으니까. 게다가 녀석에게는 새로운 식재료를 도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내일이 이토록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이다. 내일 오후에 전화를 걸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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