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월 십사 일은 연인들의 날이다. 연인들의 날인 한편으로는 지난 빼빼로 데이와는 달리 쇼우네이에게 건네 줄 초콜릿을 제대로 준비한 미노루를 위한 날이기도 했다. 화이트데이를 맞아 초콜릿을 사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들어간 가게에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 다행이었다. 조금 비싼 초콜릿을 권해 받은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알고도 놀아나는 상술이었다. 통장에는 매장에 있는 초콜릿을 전부 사고도 남을 돈이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고급 초콜릿을 사 점원의 포장까지 받아 온 참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늘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건만. 어째 쇼우네이와 만나고부터는 곧바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화이트데이 전날에도 그랬다. 다음 날 이 초콜릿을 어떻게 건네 줘야 놀림받지 않고 지나갈까 하는 사소하고도 바보 같은 고민에서부터 쇼우네이의 반응이 어떨까 하는, 선물을 준비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법한 생각까지. 온갖 잡생각들이 미노루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맴돌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탓에 한참이나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밤잠을 설쳐 가면서까지 고민했던 것이 허무하게도, 쇼우네이에게 초콜릿을 건네 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잠을 적게 자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곯아떨어진 탓이었다. 방과 후, 잠이 깼을 무렵 쇼우네이는 바로 클라리넷 레슨을 받으러 가야 해서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헤어졌다. 남은 기회는 일을 마친 뒤에 만나는 잠깐의 시간뿐이었다.
……
그나마 마감을 맡지 않은 날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일이 끝날 때쯤에 맞춰 제대로 찾아온 쇼우네이를 여덟 시쯤에 만날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퇴근하겠다는 간단한 인사를 건넨 미노루가 그답지 않은 잰걸음으로 목욕탕 밖을 나섰다. 평소 목욕탕으로 출근할 때는 잘 들지도 않던 가방에 초콜릿까지 확실히 챙겨넣은 채였다.
막상 밤길을 함께 걸으면서도 어느 타이밍에 초콜릿을 건네 주는 것이 좋을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늘상 걷던 길을 따라 걷는 내내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청소를 하려다 도리어 교실을 어질러 버린 일이라거나, 자판기가 원치 않던 책을 내어 놓은 일이라거나.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미노루의 집은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곧 헤어질 시간이었다. 쇼우네이와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졌다. 언제 초콜릿을 전해 줄까,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을 하며 초콜릿이 든 가방만 꾸욱 움켜쥐던 때였다.
“너 나한테 줄 거 없냐?”
다소 노골적인 질문에 미노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감춘다고 감췄는데 쇼우네이의 눈은 못 속인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쇼우네이가 눈치채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오늘은 화이트데이였고, 미노루는 답지 않게 머뭇거렸고, 평소에는 들지도 않던 가방을 들고 와서는 신줏단지 모시듯 양 손에 꼭 쥐고 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예상치 못하게 속내를 들킨 미노루가 멋 없게 쭈뼛거리며 가방에 넣어 둔 초콜릿을 꺼내 놓았다.
“갖고 있었으면 미리 좀 주지 그랬냐? 작년엔 나만 주고, 올해도 못 받는 줄 알았잖냐~”
귀에 꽂히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얄미우면서도 어쩐지 미노루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꽁하긴. 그리 응수하며 초콜릿을 꺼내 든 미노루가 먹을 거냐며 툭 던지듯 물었다.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것이 허탈할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쇼우네이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루가 조심스럽게 초콜릿 포장을 풀어 열었다. 예쁘게 포장해 둔 건데 어두운 곳에서 열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깝게 됐다는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뚜껑까지 열어젖힌 미노루가 쇼우네이 앞에 초콜릿을 내밀었다.
그런데 웬걸, 초콜릿을 먹겠다던 쇼우네이가 초콜릿을 집어 가지는 않고 입만 슬며시 벌리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니 저를 흘긋 보며 볼을 톡톡 두드리는 게, 암만 봐도 입에 넣어 달라는 뜻 같았다. 하여간 잔망스러운 녀석이다. 괜스레 얄미워져서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릿을 보란 듯이 한 알 집어 입 안에 쏙 넣었다. 초콜릿이 녹기 시작하며 찐득하게 입 안에 달라붙었다. 이로 베어 물었다가는 속에 든 달콤한 크림이 입 안을 가득 메울 게 뻔해 차마 초콜릿을 씹지는 못했다. 아마도 죽상이었을 거다.
그런 미노루에게 쇼우네이가 훅 다가온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장난기를 거두지 않은 표정으로 미노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쇼우네이는 이내 가볍게 입술을 맞부딪쳐 왔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입술을 비집어 열고, 혀를 집어넣어 미노루의 입 안에서 녹아내리던 초콜릿을 단숨에 꺼내 갔다. 어느새 제법 능숙해진 혀놀림에 황홀하다기보다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초콜릿을 받아먹은 쇼우네이는 헤헹, 하며 으스대고 있었다. 불과 몇 초 전에 입을 맞추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가 안 주니까 내가 가져갔잖냐. 아무튼 받아 간다?”
“난 줬거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야?”
미노루의 항변을 들은체만체 한 귀로 흘려 버린 쇼우네이는 어느새 초콜릿 상자를 열고 다음 초콜릿을 집어먹고 있었다. 이거 맛있네, 라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쇼우네이의 정강이를 한 대 차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미노루의 표정을 알아챈 듯 쇼우네이가 과장스럽게 몸을 뒤로 빼며 나는 간다, 하고 홱 돌아섰다. 원래 눈치 빠른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사귄 지 이백 일 넘게 됐다고 미노루의 눈치를 살필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 잘 가라. 그런 쇼우네이를 쫓아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미노루는 하는 수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준비한 초콜릿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건네 줄 수 있었다는 뿌듯함은 잠시 망각한 채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미노루도 집으로 몸을 돌려 현관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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