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15

설원 데이트

흰 눈은 겨울의 상징이다.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눈으로 변해 내리기 시작할 때면 사람들은 비로소 겨울이 온 것을 실감한다.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뺨에 부드럽게 내려앉다가도 이내 차갑게 녹아내린다. 입자가 조금 성길 뿐 본질 자체는 얼음이니 차가운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따금 눈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미노루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쇼우네이와 이래저래 일정이 엇갈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둘이 만나기 전날 밤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미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뒤였다. 발이 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쇼우네이도 비슷했는지 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오늘은 눈이..

1주년 2022.08.21

빼빼로 데이

시라유키 미노루는 빼빼로 데이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제아무리 편의점마다 빼빼로를 큼지막하게 진열하고 장식해 두어도, 또 같은 반 친구들이 빼빼로 데이라며 부산을 떨어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도 하지 않던가. 어린 나이부터 상업에 뛰어든 미노루에게 빼빼로 데이는 제과 회사의 상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노루네 목욕탕이 사람이 몰리는 축제 시즌에 맞춰 할인 행사나 이벤트 탕 등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들도 다른 기념일과 적당한 간격을 둔 만만한 날을 골라 자신들의 과자를 선전하는 것뿐이었다. 11.11이라는 글자가 그들이 판매하는 과자와 같은 모양이니 그나마 의미 부여 하나는 꽤 잘 했다 싶었다. 평생 그럴 줄 알았건만. 빼빼로 데이 당일, 등굣길에 만난 쇼우네이의 손..

1주년 2022.08.21

꿈 연작 - 1

역시 창문을 열어 두길 잘 했다. 창문 틈으로 쇼우네이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자면 찾아오겠다던 약속이 완전한 공수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쇼우네이로부터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미노루는 매일 밤 창문을 열어 둔 채 잠을 청했다. 아마도 창문을 열고 잔 지 한 달이 넘었을 거다. 여름이 가고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질 때까지도 쇼우네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슬슬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이뤄지지 않는 약속에 지쳐 창문을 닫고 잘까 생각하던 차였다. 마지막으로 하루만 창문을 열어 두고 자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와서 약속이 지켜진 것이 꿈만 같았다. 쇼우네이는 새벽 세 시, 모두가 잠든 이슥한 밤에 미노루의 방으로 찾아왔다. 창문 바로 앞에 있는 벚나무를 타고 이 층에 있는 ..

1주년 2022.08.21

얼떨결에 친구 이상으로

그러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미노루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우습게도 그것이었다. 며칠 전에 막 연인이 된 소꿉친구에게 반쯤 덮쳐진 채로 하기엔 지나치게 태평한 고민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미노루의 뇌는 이를 위기 상황이라 판단했고, 그 원인을 파악하기로 멋대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해도 모자라건만, 원인이나 파악하고 앉았다니. 평소의 미노루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합리적인 생각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연애라는 것은 사람을 그토록 여유 없이 쩔쩔매게 하는 데가 있었다. 어쨌거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오늘은 아마도 쇼우네이가 처음으로 미노루의 집에 놀러 온 날이었을 거다. 그래, 처음인 게 문제였다. 연인의 집에 처음 놀러 간 십 대 남학생이 ..

1주년 2022.08.21

여름날의 하굣길

여름이 돌아와도 하굣길은 늘상 시끌벅적하다.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에 기세가 죽을 법도 하건만. 수업 시간마다 덥다며 축 늘어져 있던 학생들도 하교 시간만 되면 거짓말처럼 쌩쌩해진다. 특히 방학이 가까운 이 즈음에는 발걸음들이 더욱 가볍다. 집이 가까운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마을이 떠나갈 듯 웃어댄다. 기분 좋은 날 -예컨대 용돈을 받은 다음날- 에는 한 손에 아이스 바나 주스 따위를 들고 걷기도 한다.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에서는 한 점의 걱정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두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하교하는 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멍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시라유키 미노루는 대체로 후자 쪽이었다. 하굣길에 만난 친구가 이름을 부르..

1주년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