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밤의 화원

이가미 2022. 8. 22. 09:33

꽃의 진가는 색에만 있지 않다.

 봄철의 아키타와는 형형색색의 예쁜 꽃이 곳곳에 피어 발길을 끌곤 했다. 눈이 녹아 흐르고 어느덧 개화 시기가 되면 소소하게나마 관광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꽃들이 햇빛을 받아 자태를 한껏 뽐내는 낮 시간에는 섬 전체가 외부인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활기 넘치는 한편으로는 어수선하고 부산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밤 시간이 되면 너른 꽃밭을 메우던 발길이 뚝 끊겼다. 관광객들은 해가 지고 꽃들이 빛을 잃기 전에 서둘러 배를 타고 섬 밖으로 떠나 버렸다. 다음날의 해가 뜨기 전까지는 섬 전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곤 했다. 그 때부터는 오롯이 아키타와 주민들의 시간이었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유독 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아카츠키 쇼우네이가 그랬다. 얼핏 가벼워 보이는 그는 실은 제법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예술에 조예가 깊고 본인만의 감각 또한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밤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태양빛이 비추는 화려한 풍경의 이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시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유달리 빠르게,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특성 탓에 해가 뜨는 낮이면 다른 모든 감각이 시각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쇼우네이에게 밤 산책 시간은 시각의 뒤로 밀려나 있던 다른 감각들을 깨우는 시간이었다. 저벅이는 발소리와 풀벌레 소리, 흙과 풀의 냄새, 보드라운 흙의 감촉 같은 것은 시각이 힘을 잃고 나서야 극대화된다. 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쇼우네이에게 ‘꽃구경을 한다’ 는 행위는 총천연색의 꽃을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을 의미했다. 쇼우네이만이 간직한 한 가지 비밀은 꽃은 밤에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밤에 꽃이 잔뜩 핀 곳을 찾으면, 낮에는 희미하게만 느껴졌던 꽃 향기가 코를 톡 쏘듯 강렬하다는 사실에 먼저 놀랄 것이다. 꽃은 제각기 다른 색과 모양을 가진 것처럼 제각기 다른 향을 지녔다. 밤은 꽃들이 저들의 개성을 향으로 뽐내는 시간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향이 밤공기를 타고 올라오다가 실바람이라도 불어 오면 온 사방에 퍼진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향이지만 다른 감각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빽빽이 피어난 풀잎이 사르락거리며 서로를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여린 꽃잎들이 무릎께에 닿으며 몸을 간질인다. 밤의 꽃밭은 시각이 한 발 뒤로 물러난 캔버스였다. 쇼우네이가 관심을 갖는 인상파의 그림처럼, 봄날 밤의 꽃밭은 매 순간순간 바람에 흔들리며 색다른 모습을 자아냈다. 감각들이 제각기 힘을 총동원해 시시각각 다른 자극을 주었다. 그곳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비치는, 쇼우네이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미노루의 퇴근 시간에 맞춰 목욕탕으로 가던 중, 문득 그를 자신만의 비밀에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에 쇼우네이가 씨익 웃음지었다. 그 날의 퇴근길은 조금 특별할 예정이었다.

 예정 시간에 맞춰 나온 미노루의 손을 잡고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왜 그리로 가냐고 말은 하면서도 고분고분히 따라와 주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와 다른,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발치에 핀 꽃들이 둘을 맞이한다. 조금씩 깊이 걸어들어갈수록 점점 더 높이 자란 꽃들이 둘을 반기고, 어느새 꽃밭의 한가운데에 다다를 즈음에는 무릎께를 스친다. 꽃밭 중앙에 선 쇼우네이가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넓은 들판에 오직 둘뿐이었다.

 

“어때?”

 

 쇼우네이의 물음은 아주 짧았지만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일견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벅차 보이기도 했다. 남몰래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것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살며시 열어 보이는 것처럼, 쇼우네이의 목소리는 들떠 있으면서도 묘하게 은밀한 기색을 띠는 데가 있었다.

 

“예뻐.”

“그거 말고.”

 

 쇼우네이의 목소리에 들어찬 기대감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미노루가 겨우 꺼낸 감상은 단 두 글자였다. 어둠 탓에 꽃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쇼우네이가 원하던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기뻐하려나. 미노루가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는 사이 쇼우네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눈 감아 봐.”

 

 물론 쇼우네이 자신은 밤 풍경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미노루는 그런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소질이 없는 것 이상으로 거북해하는 편이었다. 그런 탓에 너른 밤하늘 아래에서 깊은 어둠이 순식간에 자신을 덮쳐 오는 것이 싫었나 보다. 선뜻 눈을 감으려 들지 않는 미노루의 손을 쇼우네이가 따스하게 감싸 쥐었다. 마치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하는 듯한 온기에 미노루의 눈꺼풀이 그제서야 파르르 떨리며 감겼다. 그때서야 미노루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쇼우네이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도, 예쁘다는 대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이유도, 또 눈을 감아 보라고 한 이유까지도.

 눈을 감으니 제일 먼저 귀가 뜨였다. 살랑살랑 불어 오는 봄바람이 뺨을 감싸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바람은 하늘하늘한 꽃잎들도 흔들어놓아서, 모두 인사라도 하는 듯이 일제히 사라락 아우성쳤다. 반가워, 미노루. 바람에 꽃들이 흩날리는 소리가 저를 환영하는 인사처럼 들렸다. 그 다음은 후각이었다. 마치 품 속에 고이 간직하던 향기 주머니를 터뜨리듯, 밤공기를 타고 올라오는 강렬한 꽃 향기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향에 흠뻑 취한 미노루가 숨을 깊이 들이쉬자, 더욱 아찔한 꽃향기가 숨결을 타고 빨려 올라오며 폐포 하나하나를 채워나갔다.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즈음, 꽃향기에 취한 미노루의 다리를 작고 여린 무언가가 톡톡 두드렸다. 작은 꽃송이였다. 그때서야 촉각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온 몸을 휘감는 부드러운 봄바람과 다리와 발목을 스치는 풀잎의 간질임이 기분 좋았다. 자그마한 풀꽃이 주는 촉각에 더욱 집중하고 싶었다.

 마침내 미노루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생명줄이라도 된 것마냥 자신을 꼭 쥐던 미노루 탓에 선명한 자국이 남은 쇼우네이의 손이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무엇보다도 미노루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쇼우네이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바라던 변화였다. 미노루가 밤 산책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랐다. 어둠 속에 삼켜지는 것 같아서 싫다는 말 대신 바람 냄새와 풀벌레 소리가 기분 좋았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시각에 매몰되어 겁을 내는 미노루가 다른 감각에 눈을 뜨기를 바랐다.

 어둠 속에는 많은 감각이 숨어 있다. 밤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은 미노루의 생각보다 훨씬 충만하고 따스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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