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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연작 - 2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고 잠든 지 몇 달이 지났다. 그 때 감기에 호되게 걸려 결석까지 한 뒤로 날이 완전히 풀리기까지 창문을 열지 않기로 했건만. 창문을 열지 않은 날부터 미노루는 밤마다 쇼우네이가 그리워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곤 했다. 그런 상태였으니 당분간은 창문을 열지 않겠다는 몇 달 전의 결심이 쉽게 무뎌지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날이 채 따뜻해지기도 전인 삼 월 말경에 다시 창문을 열었다. 봄이 완연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한 시기였다. 방 창문으로 바로 보이는 벚나무도 봉오리를 몇 개 맺었을 뿐, 미처 꽃을 틔우기도 전이었다. 창문을 열자 여전히 찬 밤바람에 흔들리는 벚꽃 봉오리들이 옅은 향을 내며 미노루를 간질였다. 그 모습이 마음을 어지러이 흩어 둘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또다시 새벽 ..

1주년 2022.08.21

새해 첫 날

새해 첫 날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몸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때는 이미 아홉 시였다. 눈을 뜨자 이미 창문 틈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기에는 너무 충분히 잤다. 시원하게 기지개나 한 번 켠 미노루가 옆에 누운 쇼우네이 쪽을 내려다보았다. 쇼우네이는 여전히 꿈나라 여행 중인 듯 미동도 없었다. 쇼우네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전날 밤 생각이 났다. 둘 다 새해 첫 여행을 너무나 기대한 나머지 의견이 충돌해 싸움까지 났었던 밤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물론 새해가 오기 몇 분 전에 극적으로 잘 풀었지만 쇼우네이의 얼굴을 다시 보니 어쩐지 조금 얄미운 마음이 들어 곤히 자고 있는 볼을 쿡 찌르자 짜증 섞인 잠투정이 돌아왔다...

1주년 2022.08.21

첫 키스

약 이 주만의 데이트였지만 쇼우네이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푹푹 쉬어댈 만큼이나 심란했다. 정작 나란히 걷던 미노루 -문제의 원흉- 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성탄절 장식물에 감탄하고만 있었다. 성탄 전야를 맞아 온 거리가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모두 하나같이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퍽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늘상 표정이 거기서 거기인 미노루조차도 풀어진 얼굴로 실실 웃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 가운데,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잔뜩 골이 난 사람은 사람은 쇼우네이뿐일 터였다. 본디 종교 지도자의 탄생을 축하하던 성탄절은 어느샌가부터 연인들의 날로 변모했다. 성탄절 바람이 코끝을 스치기 시작할 때부터 온갖 미..

1주년 2022.08.21

설원 데이트

흰 눈은 겨울의 상징이다.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눈으로 변해 내리기 시작할 때면 사람들은 비로소 겨울이 온 것을 실감한다.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뺨에 부드럽게 내려앉다가도 이내 차갑게 녹아내린다. 입자가 조금 성길 뿐 본질 자체는 얼음이니 차가운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따금 눈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미노루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쇼우네이와 이래저래 일정이 엇갈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둘이 만나기 전날 밤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미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뒤였다. 발이 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쇼우네이도 비슷했는지 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오늘은 눈이..

1주년 2022.08.21

빼빼로 데이

시라유키 미노루는 빼빼로 데이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제아무리 편의점마다 빼빼로를 큼지막하게 진열하고 장식해 두어도, 또 같은 반 친구들이 빼빼로 데이라며 부산을 떨어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도 하지 않던가. 어린 나이부터 상업에 뛰어든 미노루에게 빼빼로 데이는 제과 회사의 상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노루네 목욕탕이 사람이 몰리는 축제 시즌에 맞춰 할인 행사나 이벤트 탕 등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들도 다른 기념일과 적당한 간격을 둔 만만한 날을 골라 자신들의 과자를 선전하는 것뿐이었다. 11.11이라는 글자가 그들이 판매하는 과자와 같은 모양이니 그나마 의미 부여 하나는 꽤 잘 했다 싶었다. 평생 그럴 줄 알았건만. 빼빼로 데이 당일, 등굣길에 만난 쇼우네이의 손..

1주년 2022.08.21

꿈 연작 - 1

역시 창문을 열어 두길 잘 했다. 창문 틈으로 쇼우네이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자면 찾아오겠다던 약속이 완전한 공수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쇼우네이로부터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미노루는 매일 밤 창문을 열어 둔 채 잠을 청했다. 아마도 창문을 열고 잔 지 한 달이 넘었을 거다. 여름이 가고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질 때까지도 쇼우네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슬슬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이뤄지지 않는 약속에 지쳐 창문을 닫고 잘까 생각하던 차였다. 마지막으로 하루만 창문을 열어 두고 자자고 다짐했는데, 이제 와서 약속이 지켜진 것이 꿈만 같았다. 쇼우네이는 새벽 세 시, 모두가 잠든 이슥한 밤에 미노루의 방으로 찾아왔다. 창문 바로 앞에 있는 벚나무를 타고 이 층에 있는 ..

1주년 2022.08.21

얼떨결에 친구 이상으로

그러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미노루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우습게도 그것이었다. 며칠 전에 막 연인이 된 소꿉친구에게 반쯤 덮쳐진 채로 하기엔 지나치게 태평한 고민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미노루의 뇌는 이를 위기 상황이라 판단했고, 그 원인을 파악하기로 멋대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해도 모자라건만, 원인이나 파악하고 앉았다니. 평소의 미노루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합리적인 생각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연애라는 것은 사람을 그토록 여유 없이 쩔쩔매게 하는 데가 있었다. 어쨌거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오늘은 아마도 쇼우네이가 처음으로 미노루의 집에 놀러 온 날이었을 거다. 그래, 처음인 게 문제였다. 연인의 집에 처음 놀러 간 십 대 남학생이 ..

1주년 2022.08.21

여름날의 하굣길

여름이 돌아와도 하굣길은 늘상 시끌벅적하다.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에 기세가 죽을 법도 하건만. 수업 시간마다 덥다며 축 늘어져 있던 학생들도 하교 시간만 되면 거짓말처럼 쌩쌩해진다. 특히 방학이 가까운 이 즈음에는 발걸음들이 더욱 가볍다. 집이 가까운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마을이 떠나갈 듯 웃어댄다. 기분 좋은 날 -예컨대 용돈을 받은 다음날- 에는 한 손에 아이스 바나 주스 따위를 들고 걷기도 한다.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에서는 한 점의 걱정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모두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하교하는 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멍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시라유키 미노루는 대체로 후자 쪽이었다. 하굣길에 만난 친구가 이름을 부르..

1주년 2022.08.21

빛에 맞닿은 그림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대다수 과학자의 설명이었다. 각각의 생명체가 남기는 자손들 중 어떤 개체가 살아남을지를 자연이 선택해 종국에는 특정한 종의 성쇠를 결정한다. 참으로 냉정한 법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흡혈귀들이란 그리 축복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햇빛에 약해 낮에는 굴이나 땅 속에 숨어 살아야 하면서도 밤에 자유로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어떠한 특질도 가지지 않았다. 다른 동물을 사냥하고 섭취해 살아가는 동물들은 희생양을 빠르게 잡아챌 수 있는 빠른 발이나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을 강력한 힘, 맹독, 그마저도 아니라면 기습을 위한 위장술이라도 가지고 태어나기 마련이었다. 흡혈귀들은 이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사냥감을 잡으면 근육과 피, 내장..

기타 2022.07.14

세 방울의 사랑

남자아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근사한 모든 것들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아카츠키 쇼우네이는 유달리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그저 예쁘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히 아름다운, 꿈의 한 자락에서나 볼 법한 황홀한 것들에 종종 눈길을 주었다. 예컨대 햇빛을 받으면 호박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설탕 과자나 분홍빛을 한 스푼 더한 붉은 저녁녘의 구름, 예쁜 분홍빛과 보랏빛의 파스텔 가루를 흩어 놓은 듯 몽환적인 빛깔의 유니콘 따위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카츠키 쇼우네이는 마법소년이 되었다. 그럴듯하게 꾸며낸 가짜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마법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마법을 날 때부터 특별한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특권이라 칭했다. 사전..

기타 202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