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설원 데이트

이가미 2022. 8. 21. 01:39

 흰 눈은 겨울의 상징이다.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눈으로 변해 내리기 시작할 때면 사람들은 비로소 겨울이 온 것을 실감한다.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뺨에 부드럽게 내려앉다가도 이내 차갑게 녹아내린다. 입자가 조금 성길 뿐 본질 자체는 얼음이니 차가운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따금 눈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미노루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쇼우네이와 이래저래 일정이 엇갈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둘이 만나기 전날 밤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미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뒤였다. 발이 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지만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쇼우네이도 비슷했는지 약속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오늘은 눈이 너무 많이 쌓였으니 다음에 보자든가, 그런 메시지가 도착해 있을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약속 시간에 맞춰 선착장에 나간 미노루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도감과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을 크게 흔들어 버렸나 보다. 키득이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는 쇼우네이가 먼 발치에서도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본 쇼우네이는 늦가을에 보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검은 바지를 입고 짙은 회색 코트를 여며 입고 있었다. 코트는 조금 추울 텐데, 같은 생각을 할 찰나 목에 둘러진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미노루가 매고 온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그 즈음의 둘은 자잘한 물건들을 맞춰 사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연인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함께 산 목도리도 그 중 하나였다. 같이 맞춘 목도리까지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선착장에서 만난 것이 무색하게도 만나자마자 나온 이야기는 배를 타지 말자는 것이었다. 흰 눈은 도시에서는 골칫거리였다. 순수하고 깨끗해 보이던 것도 잠시뿐, 이내 자동차 바퀴에 밟히고 구둣발에 채이며 지저분하게 녹아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흙먼지에 갈색으로 물든 눈을 피하며 걷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발걸음을 조금 옮겨 선착장 근처의 뜰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꽤나 이른 시간에 만나서인지 걷는 내내 누구도 밟지 않은 눈길이 이어졌다. 소복이 쌓인 눈은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냈다. 두 명분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히는 것이 마냥 기분 좋았다.

 너른 들판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가운데로 달리기 시작했다. 숨가쁘게 달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나왔다. 저기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어디인지도 불분명한 곳을 가리키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기를 걸고서는 자기가 먼저 도착하겠다며 달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십 대 소년들이었다. 평소에는 승부를 가리는 데 관심이 없다가도 이럴 때면 마음부터 달음박질치고 만다. 결국 중간쯤 간 쇼우네이가 몸을 날리듯 엎어지며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고 주장하고서야 내기는 끝이 났다. 쇼우네이가 도착한 곳이 애초의 목표 지점이었는지는 둘 중 누구도 몰랐고,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승패가 걸린 내기였다는 사실은 어느새 까맣게 잊은 듯 둘은 너나없이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웃고 나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른 설원은 두 사람이 달려온 방향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 없이 깨끗했다. 눈 덮인 벌판을 전세 낸 듯 멋진 기분이었다. 어느새 웃음기가 조금 잦아든 쇼우네이가 눈사람을 만들자며 눈덩이를 뭉쳐 굴리기 시작했다. 쇼우네이가 굴린 몸통에 얹을 머리를 만들기 위해 미노루도 눈을 뭉쳤다. 몇 초 지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쇼우네이의 목소리를 들은 미노루가 쇼우네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퍽,

 눈뭉치가 미노루에게로 날아와 어깻죽지에 그대로 명중했다. 묵직하게 얼얼한 것을 보니 꽤나 큰 눈덩이였던 모양이다. 눈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쇼우네이가 짖궂게 웃어젖히고 있었다. 손이 빈 것을 보니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뭉치던 눈덩이를 그대로 던진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 뒤질세라 미노루도 뭉치던 눈덩이를 쇼우네이에게로 날렸다. 빠르게 피한 탓에 아슬아슬하게 빗맞았다. 그 때부터 눈사람을 만드는 건지 눈덩이를 던지는 건지 모를 유치한 눈싸움에 불이 붙었다. 화해하고 눈사람을 만들자고 하다가도 금세 굴리던 눈덩이를 서로에게 던지기 바빴고, 눈사람은 도통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한 건 먼저 지친 미노루가 백기를 들고 나서부터였다. 그 즈음에는 쇼우네이도 꽤나 힘을 많이 뺐던 탓에 뒤늦게 만들기 시작한 눈사람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작은 눈뭉치 두 개를 만들어 얹었을 뿐인데도 커다란 3단 눈사람이라도 만든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완성된 눈사람은 볼품없었지만 근처에서 나뭇가지 두 개를 구해 와 팔을 꽂고 나니 나름대로 봐 줄 만한 모습이었다. 눈사람을 완성한 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원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차가운 눈이 몸의 무게에 눌려 부드럽고 푹신하게 꺼졌다. 꼭 솜 이불 속에 몸을 누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따금 눈은 따스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느새 미노루 쪽으로 시선을 돌린 쇼우네이가 장난기 어린 한 마디를 했다. 네 코 엄청 빨간 거 아냐? 이에 질세라 쇼우네이 쪽을 돌아본 미노루도 한 마디 했다. 넌 얼굴이 온통 빨개. 별 것도 아닌 일로 유치한 설전을 벌이던 중, 쇼우네이의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녹아내렸다. 이윽고 미노루의 뺨에도, 머리칼에도, 옷에도.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점점 그 굵기를 더해갔다.

 둘이 동시에 돌아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난 건 싸라기처럼 내리던 눈이 송이송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코트와 털옷에 묻은 눈을 손으로 탁탁 털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발이 거세질세라 조금씩 속도를 올리던 중, 미노루. 라며 이름을 부르는 쇼우네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미노루가 쇼우네이 쪽을 돌아보자 쇼우네이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미노루의 목덜미에 양 손을 댔다. 목도리 안에 감추어진 따뜻한 살에 차디찬 손이 닿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며 새된 비명이 새어나왔다. 뭐 하는 거냐며 화를 내도 쇼우네이는 따뜻하다며 실실 웃을 뿐 손을 뺄 생각을 않았다. 이에 질세라 미노루도 얼어붙어 감각마저 둔해진 두 손을 쇼우네이의 뺨에 가져다댔다. 겨울바람을 맞은 뺨은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손보다는 따스해서, 쇼우네이의 뺨에 닿은 손가락부터 녹아 피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쇼우네이가 뭐 하는 거냐며 성을 냈지만 미노루 또한 아랑곳 않았다. 도리어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결국 쇼우네이도 더 이상 따지기를 포기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이 꽤나 우스운 모양이었다. 둘의 웃음소리는 입김이 되어 고요한 겨울 하늘을 타고 올라갔다. 어쩐지 이번 겨울은 전보다 더 따스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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