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빛에 맞닿은 그림자

이가미 2022. 7. 14. 23:30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대다수 과학자의 설명이었다. 각각의 생명체가 남기는 자손들 중 어떤 개체가 살아남을지를 자연이 선택해 종국에는 특정한 종의 성쇠를 결정한다. 참으로 냉정한 법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흡혈귀들이란 그리 축복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햇빛에 약해 낮에는 굴이나 땅 속에 숨어 살아야 하면서도 밤에 자유로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어떠한 특질도 가지지 않았다. 다른 동물을 사냥하고 섭취해 살아가는 동물들은 희생양을 빠르게 잡아챌 수 있는 빠른 발이나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을 강력한 힘, 맹독, 그마저도 아니라면 기습을 위한 위장술이라도 가지고 태어나기 마련이었다. 흡혈귀들은 이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사냥감을 잡으면 근육과 피, 내장까지 먹어치워 생장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포식자들에 반해 그들이 영양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피뿐이었다. 한 마디로 현대 과학의 주류 이론에 따르면 멸종되기 딱 알맞은 존재들이었다. 그에 더해 인간의 피를 흡수해 살아가는 습성 탓에 생태계의 정점에 올라선 인간으로부터 배척당하기까지 했으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이래로 인간과 흡혈귀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이어져 왔다. 인간에 비해 불리한 여러 조건으로 인해 흡혈귀는 곳곳에서 내몰리며 빠른 속도로 세력을 잃어갔다. 현재로부터 약 오십여 년 전, 마지막 남은 흡혈귀의 잔당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고 퍼졌을 때 인류는 환희를 감추지 않았다. 온 세계에 축제가 벌어졌다. 지긋지긋한 흡혈귀와의 전쟁은 비로소 끝을 맺었다. 인간의 승리였다.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심지어 대자연마저도 외면한 그들이었으나 신은 그 가련한 존재들에게마저 자비로운 손길을 베풀었다. 모두가 멸종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던 흡혈귀들 중 극소수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남은 이들은 인세에 자연스레 숨어들어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었다. 흡혈귀는 햇빛에 약해 낮에는 움직일 수 없다. 그 머리칼은 검거나 희며 눈은 빨갛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뾰족한 송곳니를 지닌다. 이것이 세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소수의 흡혈귀들은 이같은 상식을 허무는 자들이었다. 비록 크나큰 기력 소모를 동반했지만 햇빛에 적응해 낮에도 어느 정도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머리칼은 염색하면 그만이었고, 눈동자 또한 컬러 렌즈의 발달로 무리 없이 감출 수 있었다. 원활한 식사를 위한 날카로운 송곳니만큼은 쉬이 갈아낼 수 없었으나 사람들은 낮에 실외를 돌아다니는 모습만으로 쉽게도 의심을 지웠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인간의 피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른 동물의 피 역시 효율은 매우 떨어지지만 많은 양을 섭취하면 정상에 가까운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목을 물다 눈에 띄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흡혈귀들은 극소수이지만 큰 문제 없이 세상에 섞여들었다. 그 중 하나가 시라유키 미노루였다. 머리칼이 희고 송곳니가 조금 눈에 띄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소년이었다. 비록 해가 떠 있을 때는 체력 소모 탓에 주로 잠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보통 인간이 먹는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으며 해가 긴 여름을 눈에 띄게 싫어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정상적으로 등교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 그는 무기력하며 잠이 아주 많고 식사량이 극히 적지만 평범한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무렵, 날이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할 즈음에도 시라유키 미노루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그가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다섯 시에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새벽 다섯 시는 해가 떠오르기 전의 시간이었다. 그 때 일어나야만 햇빛을 받지 않고 실내인 목욕탕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대강 씻은 미노루는 냉장고를 열어 돼지의 피를 연달아 두 팩 마셨다. 배가 터질 듯이 불러왔지만 오전 업무와 학교에서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마셔 둬야만 하는 최소한의 양이었다. 피를 마신 직후 이를 닦아 입안을 은은히 맴도는 피비린내를 지운 그는 양 쪽의 붉은 눈동자에 푸른 렌즈를 끼웠다. 감쪽같았다. 렌즈를 끼우고 나니 시계는 다섯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여름이었다면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으나 겨울이 가까워 온 지금은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었다. 옷매무새를 적당히 다듬은 미노루는 아침에 입고 갈 교복을 꺼내 둔 뒤 다섯 시 삼십 분에 집을 나섰다.
 이제는 완벽히 적응이 된 오전 업무를 마친 그가 챙이 있는 모자를 눌러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여나 이상한 눈길을 받을세라 양산을 쓰는 등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조금씩 밀려올라와 제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해를 막을 방어책 중 유일하게 마음 놓고 사용할 만한 것은 누구나 평범하게 쓰고 다니는 챙 모자뿐이었다. 그마저도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할 때는 쓰지 않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흡혈귀인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몇 차례에 걸쳐 신신당부한 탓이었다. 눈에 띄게 햇빛을 가리려는 시도가 반복되면 조금이나마 의심을 살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 모자를 벗은 그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나섰다. 또다시 힘겨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학교에서는 왜 그리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지,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푹푹 나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인 교실에서 보낸다지만 교실은 바깥을 향한 창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운 곳이었다. 햇볕을 막는 기능은 빵 점이었다. 거의 모든 수업 시간을 자면서 버티는데도 하교 시간쯤 되면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다. 중간에 깨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라도 있는 날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과목들 중에서도 음악, 미술, 특히 체육을 싫어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편히 잠을 잘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야외 체육 수업이라도 있는 날은 이후 시간을 통째로 양호실에서 보내야 했다.
 오늘은 금요일,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다. 미노루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필 체육 수업이 3교시라니. 오후 수업이라면 이후 시간을 양호실에서 보내기 비교적 쉬웠고 여차하면 조퇴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에 비해 오전의 체육 수업은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점심 시간을 끼고 양호실에서 뭉개고 있기도 마땅찮았고, 무엇보다도 늘 점심을 함께 먹는 이가 있었기에 어디서 시간을 죽이든 한 번은 일어나야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후 약 반 년간 학교에서 맞은 위기는 전부 금요일에 있었다. 약 두어 시간 후에 있을 체육 시간을 넘기려면 힘을 비축해야 한다. 걱정을 한가득 안은 채 미노루는 체력 비축을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그간의 숱한 위기에도 특유의 강한 정신력으로 버텨 온 그였건만, 삼 교시를 겨우 끝낸 미노루의 다리가 눈에 띄게 후들거렸다. 가빠진 숨은 얕고 불규칙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오늘이 체력장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 나오지 않았을 텐데, 학사 일정 검토를 게을리한 것이 화근이었다. 운동장 여덟 바퀴를 달리는 동안 쓰러지지 않은 자신이 용한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미노루가 몇 번이고 가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리의 주인공이 미노루의 어깨를 잡고 섰다. 연인 쇼우네이였다. 제법 급히 달려왔는지 그의 호흡도 저만큼은 아니지만 흐트러져 있었다. 보아하니 멀리서도 제 상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채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흡혈귀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흡혈귀에게는 인간적인 감정도 질서도 없으며 혹여나 호의적인 감정을 나타낸대도 그 모든 것이 사냥감을 꾀기 위한 연기라는 것이 세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달랐다. 세간의 상식은 언제고 자신들을 사냥할 수 있는 상위 포식자를 경계한 인간의 거짓된 음해에 지나지 않았다. 흡혈귀를 발견하는 즉시 살해해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저들의 적인 흡혈귀가 악독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단정짓는 편이 여러모로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입맛대로 조작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흡혈귀와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인간의 상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들 역시 일정한 질서를 가졌다. 또한 그들은 저와는 다른 존재들, 예컨대 인간의 세계에 흘러들어갈 때는 그들의 법칙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이들이었다. 흡혈귀 간의 상호작용과 인간 간의 교류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느끼는 감정의 종류가 인간과 비슷한 탓이었다. 그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었으며 이를 표출하는 방식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냉혈한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들도 사랑하는 이와 미래를 약속하고 가정을 이루며 그 총체를 가족이라 칭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들 또한 대를 이어 온 것이 그 증거였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미노루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받아들여 적응한 덕에 주변인들과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고 친구 역시 많았다. 그 모든 것이 연기라는 이야기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친구들과 원만환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선대 흡혈귀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 준 조언 때문이었지만 친구 하나하나를 아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마음속에 그어 둔 최소한의 선은 있었지만 옆에 있는 모두에게 호의를 품고 성심성의껏 대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학교에 입학하려는 그에게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본인들은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말로 시작된 그 이야기는 사뭇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그 누구와도 갈등을 만들지 않고 원만히 지내되 너무 깊은 관계는 맺지 않을 것. 그 외에도 몇 마디가 더 이어졌지만 결국 모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이야기였다. 비록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미노루는 그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 지켰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주변인과의 거리는 쉽게도 좁혀져 버렸다. 인간들이 종종 제 뜻대로 조절되지 않는 감정에 괴로워하듯 흡혈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노루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마음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온 한 사람 앞에서는 선대들의 충고도 제 나름의 다짐도 소용없었다. 그 주인공은 미노루의 연인, 아카츠키 쇼우네이였다. 그는 미노루가 남몰래 그어 둔 경계선을 제멋대로 침범해 종종 다투기도,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다가 어느새 미노루의 마음 속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쇼우네이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미노루 본인도 모를 일이었으니 잘잘못을 따지는 것조차 의미 없다는 설명이 조금 더 정확한 이야기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사랑이 시작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상관없었다. 그가 이미 미노루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고 이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만이 의미가 있었다. 그런 쇼우네이가 지금은 미노루의 옆에 서서 가만히 헛구역질을 하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얼른 양호실에라도 가자는 쇼우네이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씩 겨우 떼는 와중에도 뱃속이 출렁이는 듯한 울렁거림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의 중앙현관까지 도달하는 그 짧은 순간이 몇 시간 같았다.
 
 부축 자체가 효과가 있었던 건지 옆에서 제 상태를 꾸준히 살피는 쇼우네이의 존재에 마음이 놓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미노루는 햇빛이 들지 않는 학교 건물 안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자 조금이나마 살 것 같았다. 미노루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제가 지나 온 운동장 한복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교시가 끝나는 시간은 한낮이라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그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한 시간을 서 있었으니 몸 상태가 악화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오 전에 운동장을 떠나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햇볕도 피했겠다, 그 이상 쇼우네이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체육 시간마다 손을 쓸 수 없이 약해지는 티를 내서는 안 되는 탓이었다. 흡혈귀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들키는 것은 금물이었다. 여차하면 가족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었다. 다행히 여지껏 들키지 않았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었다. 미노루가 천천히 자리에 멈춰 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저를 따라 멈춰선 쇼우네이를 향해 미노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이제부터는 나 혼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진짜냐? ……다행이네. 아까 너 진짜 큰일 날 것 같았다니까. 깜짝 놀랐잖냐."
"응…… 사실 별 거 아니었어. 그래도 조금 쉬고 싶으니까……."
 
 오늘 점심은 다른 친구들이랑 먹어, 그리 말하려던 찰나, 복도를 달리던 한 학생이 미노루의 팔을 거세게 치고 지나갔다. 그 충격 탓에 가까스로 진정시켰던 토기가 다시금 울컥 치밀어올랐다. 제게 사과를 건네는 학생의 목소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노루의 낯빛이 급속도로 흐려졌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쇼우네이가 괜찮냐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그 때였다.
 미노루가 저를 향해 뻗어 오는 쇼우네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탁 소리가 나게 손을 내친 그가 도망치듯 달려 금세 쇼우네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망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것도 잠시, 쇼우네이 또한 걸음을 재촉해 미노루를 뒤쫓았다. 추측컨대 미노루의 행선지는 화장실이었다. 미노루가 달려간 방향에 있는 것이라고는 화장실을 제외하면 교장실이나 행정실 정도였으니 당연한 추론이었다. 조금씩 속도를 올리던 쇼우네이가 이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몇 초 전 보았던 일그러진 미노루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그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 쪽으로 다가갈수록 소리가 가까워졌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끙끙 앓는 소리 같기도, 무언가를 토해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미노루의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쇼우네이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쇼우네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화장실 바닥이 온통 시뻘건 액체로 물들어 있었다. 미노루는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은 채 무언가를 게워내듯 헛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것은 미노루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미노루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갈 곳을 잃은 쇼우네이의 눈과 핏발이 선 미노루의 눈이 일순간 마주치는 듯 싶더니, 바로 다음 순간 미노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쇼우네이가 미노루를 향해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양의 피를 토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미노루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쇼우네이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미노루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쇼우네이가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밟으려던 그 때였다. 가만히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던 미노루가 소리를 내질렀다.
 
"나가!"
 
 여태껏 미노루는 그 누구에게도 소리쳐 본 일이 없었다. 늘 차분하던 그가 갑자기 큰소리를 냈으니 쇼우네이도 놀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평소와 다른 제 모습을 낯설어할 겨를도, 제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란 쇼우네이의 표정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만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에 저 역시 놀라 황급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제게서 나온 말은 고함이라기보다도 새된 비명에 가까웠다.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쇼우네이는 미노루의 기세에 조용히 뒷걸음질쳐 화장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 저와 화장실 바닥을 더럽히는 피웅덩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얼떨결에 화장실에서 쫓겨나듯 나온 쇼우네이였지만 불과 몇 초 전 목격한 광경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흐려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해지는 기억 속에 생생해져만 갔다. 바닥에 제법 넓게 고여 있던 피 웅덩이, 그리고 그 가운데 주저앉은 미노루. 헛구역질을 하던 그 모습에 피를 토해낸 것일까 싶다가도 바닥에 고인 피의 양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쇼우네이라지만 기침 몇 번에 토해낼 수 있는 피의 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혹시 넘어진 충격에 머리라도 다친 것일까. 그 충격에 피가 흘러나온 것일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전에 어딘가에 나 있던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을 수도 있다.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쇼우네이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미노루의 상태보다도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할 시점이었다. 쇼우네이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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