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9

영화 연작 - 1

거래는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 이루어진다. 상대가 가진 재화를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누릴 편익보다 못한 값으로 구매하는 것이 거래의 본질이었다. 미노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손해 될 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상인의 철칙인 탓에 자영업자 집안의 외동아들인 그는 그런 쪽으로는 다른 이들보다 민감했으면 민감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표 값을 내고 시간을 들여 영화를 보는 일은 하등의 이점이 없는 거래였다. 그에게는 영화를 볼 돈으로 어묵이라도 몇 덩이 사 먹는 것이 훨씬 나았고 영화를 볼 시간이 있으면 잠이라도 자 두는 것이 몇 배쯤 유익한 선택이었다. 그간 그에게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해 온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럴 때마다 미노루는 여러 핑계를 대며 그들의 권유를 ..

기타 2021.12.27

제목추천좀

하루를 살아도 알차게 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말처럼 같은 시간에도 밀도 차라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미노루의 경우만 보아도 그랬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투루 사용하는 시간 없이 바삐 일하기도, 다른 어떤 날은 원 없이 잠을 자다가 노을이 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눈을 뜨기도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한결같이 게으르게 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결같이 성실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평소 그의 행실은 제법 들쑥날쑥했다. 그런 미노루의 근 몇 달간은 어느 누가 보아도 밀도 높은 나날이었다. 모두 그의 연인 아카츠키 쇼우네이로 인한 결과였다. 미노루는 쇼우네이와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원래부터 바삐 지내던 평일에는 억지로 시간을 비집어 냈으며 한가로..

기타 2021.11.30

제목 짓는 법 삽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 고대의 아카츠키 일족에는 그리 불리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외모와 체력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노화가 멈춘 이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마저도 그들만은 슬그머니 비껴갔다. 수많은 이들이 나이를 먹어 이 땅을 스쳐지나는 와중에도 언제까지고 청춘의 정점을 구가하는 그들은 자연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일족 전부가 그들을 신의 아이라며 떠받들었다. 신의 아이는 아무런 전조 없이 태어났다. 발생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어느 부부에게서 태어날지조차 짐작이 불가능했다. 발생 원인과 그들의 말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가운데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신의 아이가 수백 년에 한 명 꼴로 생겨난다는 것과 직..

기타 2021.11.20

하와와 쇼네쟝 토끼라는거시야요

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 고대의 아카츠키 일족에는 그리 불리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외모와 체력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노화가 멈춘 이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마저도 그들만은 슬그머니 비껴갔다. 수많은 이들이 나이를 먹어 이 땅을 스쳐지나는 와중에도 언제까지고 청춘의 정점을 구가하는 그들은 자연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일족 전부가 그들을 신의 아이라며 떠받들었다. 신의 아이는 아무런 전조 없이 태어났다. 발생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어느 부부에게서 태어날지조차 짐작이 불가능했다. 발생 원인과 그들의 말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가운데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신의 아이가 수백 년에 한 명 꼴로 생겨난다는 것과 직..

기타 2021.11.20

아카시라 짧은 그리움 연작 2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런 걸 묻냐." "나 없다고 운 건 아니지?" "웬 헛소리야." 장난스럽게 묻는 족족 냉랭한 대답을 뱉어내는 것과는 달리 미노루의 표정은 기분 좋게 누그러졌다. 이틀을 기다린 끝에 제 연인인 아카츠키 쇼우네이를 다시 만났으니 그럴 법도 했다. 조금 피곤한 것을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요일 밤, 마지막 배를 타고 느지막이 돌아온 쇼우네이에게 일단 쉬고 다음 날 아침에 만나자고 말한 뒤 정작 미노루 본인은 잠을 설친 탓이다. 얼른 자야 다음 날 아침도 빠르게 올 텐데. 다시 쇼우네이를 보기까지의 몇 시간을 기다리기가 힘이 든 한편으로는 잠에 빠져드는 일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식을 줄 모르고 기대감과 함께 부풀어오르는 마음 탓에 몇 시간..

기타 2021.11.15

아카시라 짧은 그리움 연작 1

시라유키 미노루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은 금요일이다. 시라유키 미노루가 가장 싫어하는 요일 또한 금요일이다. 모순되는 두 사실이 동시에 참인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전적으로 그의 연인 아카츠키 쇼우네이에게 있었다. 쇼우네이는 이 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으러 아키타와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시간은 금요일이 저문 직후인 토요일 아침이었다. 미노루에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교습이 매주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쇼우네이는 교습이 없는 토요일마다 미노루에게 하루 종일을 할애하곤 했다. 그 탓에 미노루는 금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쇼우네이와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쇼우네이가 섬을 떠나고 없는 토요일을 보낼 생각에 막막해하기도 했다. 아카츠키 쇼우네이는 미노루에게 그만큼이나 특별한 의미를..

기타 2021.11.15

90분 전력

차라리 걸어가는 게 빠르겠다. 길이 막히거나 거리가 아주 가까울 때 입 밖으로 나오곤 하는 말로, 보통의 경우 과장이 한 스푼 섞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아키타와에서만큼은 한 치의 거짓을 보태지 않은 사실이었다. 작은 섬마을 아키타와에는 섬 외곽을 도는 단 한 개의 버스 노선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단 한 대만이 운행 중인, 그야말로 시골 버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십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생김새의 낡은 버스는 하루에 몇 번씩 시원찮게 털털거리며 조용한 시골길을 갈랐다. 운전기사가 단 하나뿐이니 배차 간격이 좁을 수가 없었다. 섬의 하나뿐인 기사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달리고 이른 아침이나 점심 식사 시간, 늦은 밤에는 굴러가는 법이 없는 버스였다. 간혹 기사가 늦잠을 자거나 ..

기타 202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