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아카시라 짧은 그리움 연작 1

이가미 2021. 11. 15. 00:02

이화우(@ehdska3c2) 님 커미션

 시라유키 미노루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은 금요일이다. 시라유키 미노루가 가장 싫어하는 요일 또한 금요일이다. 모순되는 두 사실이 동시에 참인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전적으로 그의 연인 아카츠키 쇼우네이에게 있었다. 쇼우네이는 이 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으러 아키타와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시간은 금요일이 저문 직후인 토요일 아침이었다. 미노루에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교습이 매주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쇼우네이는 교습이 없는 토요일마다 미노루에게 하루 종일을 할애하곤 했다. 그 탓에 미노루는 금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쇼우네이와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쇼우네이가 섬을 떠나고 없는 토요일을 보낼 생각에 막막해하기도 했다. 아카츠키 쇼우네이는 미노루에게 그만큼이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시간은 원망스러우리만치 빠르게 흘러 어느덧 토요일을 두 시간 앞둔 금요일 밤이 되었다. 이번 금요일은 미노루가 싫어하는 금요일이었다. 또 하루가 저물고 날이 밝으면 쇼우네이를 보내 줘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오고 만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입안이 괜스레 텁텁해진다. 언제나처럼 쇼우네이와 함께하는 퇴근길은 분명 한 걸음 한 걸음이 달콤해야 했건만. 한 걸음씩 집으로 가까워질 때마다 다시금 마주하게 될 짧은 작별 또한 가까워진다. 여느 때와 같이 마주잡은 두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잡는다. 미처 감싸이지 못한 손끝이 시리다.
 마침내 저 멀리 미노루의 집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둘의 발걸음이 동시에 속도를 줄여간다. 느려진 발걸음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소복이 쌓인 함박눈이 뽀드득 단단하게 짓뭉개진다. 천천히, 더 천천히 걸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흰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해 노랗게 빛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잠깐의 만남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조금이라도 오래 있으려 발걸음을 늦춰 보아도 목욕탕과 집 사이의 짧은 거리는 금세 메워지고 어느덧 마을에 몇 없는 가로등이 미노루의 집 앞을 비추는 모습에 다시금 짧은 작별을 맞이하고 만다. 마침내 가로등 불빛에 몸이 완전히 감싸이고서야 미노루가 줄곧 발끝을 향하던 시선을 돌렸다. 순간 마주친 쇼우네이의 시선은 온전히 미노루를 향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비쳐 호박색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미노루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미노루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듯 고요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미노루의 얼굴을 포착하고 만다. 쇼우네이가 조용히 미노루를 향해 몸을 돌린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네."
"……."
"다음 주에 봐."
 
 시간 되면 일요일에 올 테니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리 덧붙인 쇼우네이가 맞잡은 손의 힘을 풀어내려던 그 때, 미노루가 슬며시 빠져나가려던 그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예상치 못한 듯 쇼우네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놀란 빛을 띠었다. 그 손을 세게 붙잡은 미노루조차도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괜히 고개만 이리저리 돌릴 뿐이었다. 평소라면 뭐든 쥐어짜 술술 말했을 터였건만, 결정적인 순간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 않으면 충동적으로 붙잡은 그 손을 다시 놓아야 한다. 초조하게 입술만 달싹이던 미노루를 가만히 지켜보던 쇼우네이가 미노루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힌다. 단단한 두 손이 미노루의 양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쇼우네이의 얼굴이 미노루의 시야 가득히 담긴다. 미노루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니 다른 감각이 한결 생생해진다. 눈이 폭폭 쌓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고요한 아키타와의 밤하늘 아래에서는 쇼우네이의 엷은 숨소리마저 생생하다. 쇼우네이의 따뜻한 숨결이 발갛게 얼어붙은 코끝을 간질이며 녹인다. 그리고 몇 초 뒤, 두 입술이 살며시 마주 닿는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혀를 섞으며 타액을 주고받는 행위도 뒤따르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음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친다.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 피는 가슴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와 팽팽 돌며 귓가에 어지러이 울린다. 차디찬 겨울바람에 식었던 몸이 빠르게 열기를 더해간다. 가볍게 마주 닿은 입술만이 여전히 미약한 냉기를 지닌 채다.
 이윽고 쇼우네이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맞닿아 있던 얼굴 사이로 찬 바람이 스민다. 불과 몇 초간 이어진 입맞춤에도 발갛게 상기된 미노루의 얼굴이 눈에 띄어 쇼우네이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말라며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마저도 눈에 담겠다는 듯 쇼우네이의 시선이 미노루를 집요하게 쫓는다.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며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발끝을 바라보고 마는 미노루의 머리칼에 그새 눈이 소복이 쌓여 하얗게 반짝인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듯 털어 준 쇼우네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 갈게."
"……응."
 
 늘 가벼워 보이던 쇼우네이가 그날따라 차분한 몸짓으로 손을 조용히 흔들었다. 미노루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저와 달리 담백하게 뒤돌아서는 쇼우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쇼우네이가 완전히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손이 입술에 가 닿는다. 마치 눈송이가 내려앉듯 차갑고도 부드럽던 입맞춤은 눈송이가 또한 그러하듯 금세 녹아 사라졌다. 아쉬운 표정 짓지 말라던 쇼우네이는 무엇보다도 아쉬운, 짧은 입맞춤만을 남긴 채 어느덧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멀리 사라져갔다. 마침내 쇼우네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미노루는 눈으로 쇼우네이를 쫓았다. 제 집으로 향하던 두 명분의 발자국과 왔던 길로 돌아 나간 한 명분의 발자국이 눈 덮인 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그 모습이 못내 씁쓸해 한참 동안이나 발이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따라 유독 겨울 바람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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