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 아카츠키 쇼우네이
날씨: 맑음! 기분: 최고!
다행히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젯밤에 기를 쓰고 일찍 잠에 들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덕분에 일찍 차려입고, 가는 길을 여러번 확인하고, 열시 반 쯤에 그 녀석 집 앞에 도착해서 웬일로 일찍 나왔냐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던데, 내가 먼저 나올거라곤 생각도 못 한 모양이지. 쌤통이다. 잔뜩 키득거리며 손을 내미니 아무렇지 않게 잡아오는데, 어제부터 걱정이 앞섰던 건지 잡은 손에 묘하게 힘이 없었다. 몸이 안 좋은거면 무리하지 말자고 하니 예상 외로 긴장되어서 그런거라는 솔직한 대답을 들어서 놀랐다. ...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한 말이겠지 싶어서 선착장까지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여럿이서 나간 적은 있었지만 단 둘이서 나갔던 것은 처음인지라 여러모로 헤맸었는데, 미노루 녀석도 준비를 해온 것인듯 타야할 배라던지, 출구라던지를 잘 안내해줘서 다행이었다. 길찾기 능력을 미리 좀 키워둘걸 같은 시덥잖은 생각을 하다, 예전에도 포장마차로 안내해 주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서 그만 밖이란 걸 잊은 채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 외로 너무 굳어있어서 놀랐지만.
역 밖에 나와서 수족관까지 가는 길마저도 미노루가 안내를 해줬는데 솔직히 초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게 길을 찾길래 신기했다. 나중에 다른지역에서 길을 잃어도 얘한테 연락만 하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수족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더워서인지 조금 축축해진 손을 놓고는 심해어관부터 구경하자길래 따라갔다. 사실 물고기같은건 관심도 없고, 안쪽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나와서 다른 곳을 끌고 가려는 생각 뿐이었다. 이를테면 이전에 놀러갔던 곳과 비슷한 인형뽑기 가게라던가, 사격 카페같은 곳은 익숙하니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수족관이 지겹다고 하면 데리고 나갈 심산이었는데 생각보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온통 처음 보는 것인 양 섬에서 늘 보던 바다와는 다르다며 답지 않게 조잘대기도 하고, 말미잘이나 산호초 모형을 보며 말랑말랑 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은빛의 해수어 무리를 보며 아름답다는 둥 평소보다도 말수가 많아져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심해어관 쪽으로 연결된 터널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귀상어와 백상아리가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며 눈을 빛내는데, 물빛이 일렁임과 함께 그 녀석 얼굴에도 고스란히 비쳐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을 다시 잡아버렸다. 싫어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마주잡아줘서 마음의 짐은 덜었지만. 그 순간을 놓치기 싫어서 그만 붙잡아버렸는데 한 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놓을걸, 아마도 그 녀석은 자기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 텐데. 그 점이 아쉬웠다. 다음에도 또 같이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면 그땐 꼭 사진을 찍어야지.
바깥으로 나오면서 다음엔 어디를 갈까 이야기를 나누다 기념품점이 눈에 띄어 구경이나 하자고 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말하는걸 다 들어주려는 듯 초롱아귀 키링을 보고 같이 사자고 해도 아무말 없이 지갑을 열고(물론 눈빛은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수족관 기념주화를 열개나 뽑자고 해도 중복이 나오면 교환하자는 둥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그만 내가 먼저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쓸모도 없는 기념주화를 네개나 뽑고는 더 안뽑냐는 말에 장난이었다고 이실직고했다. 나도 양심이 꽤나 아프던 차에 그 녀석이 나를 닮았다며 작은 상어인형을 만지작거리길래 주화의 답례라는 핑계로 결제했다. 마음에 든 듯 꽤나 오래 만지작대길래 사준거기도 하지만, 평소에 내가 준 물건들을 보며 나를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예전에 줬던 것들은 이미 의미를 잊었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기억을 갱신하려는 듯이 굴게 된다. 그 녀석이 알면 어린애같다며 한껏 좋아하겠지. 알려줄 생각은 없다.
꽤나 오랜 시간 구경했던 듯 그 녀석도 힘들어하길래 식당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찾아봤던 가게가 있었는데, 체력이 부족한 그 녀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스키야키 가게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음에 놀때는 이틀 전부터 쉬고 나오라며 뭐라 했더니 이번에도... 역으로 한마디 하는게 아니라 다음 기회가 또 있냐는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그냥 입다물고 버섯이나 먹으라고 해버렸다. 이렇게 부드러운 반응을 돌려주면...어떻게 대하는게 좋을 지 모르겠어서 자꾸만 거칠게 말이 나가는데, 이러다가 오해하면 어쩌지지 싶었다. 조금 풀이 죽은 것 같았달까, 결국 평소처럼 먹여달라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원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 녀석 때문에 그런거다. 그랬더니 설마 밖에서마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새된 목소리로 "여기서?"라며 말하는데, 이게 누구때문인 줄 알고. 심술이 나서 먹여주기 전까진 하나도 안 먹는다고 했더니 결국 먹여주던데, 이럴거면 처음부터 뭐라 하지 말고 곱게 먹여주면 좋았잖아. 조금 귀찮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뭐라고 해주는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내가 하자는 것을 전부 다 해준다면...나도 어디까지 요구하게 될 지 모르니까. 그런 생각이 식사를 끝마치고도 나를 사로잡았다.
하루종일 내 자기만족으로 끌고다닌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가고싶은 곳을 가자며 원래 계획을 다 비우고는,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잡화점을 구경하거나 서점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불가능하냐며 그 녀석을 놀리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다음에 찍자 싶어 돌아다니면서 본 곳을 메모해뒀고. 섬 바깥에서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르는 듯 방황하길래 인형뽑기 가게는 어떠냐며 재차 물어봤더니 이번에도 돈을 다 써버릴 것 같아서 싫다길래 결국 못갔던것도 아쉬웠다. 이번엔 내가 몇개 뽑아줄까 싶기도 했고. 결국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녀석은 타코야키를 사고 나는 크레페를 사서 (일부러 그 녀석이 싫어할 만한 누텔라 딸기생크림 맛으로 사봤다.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조금 일찍 온 탓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엔 축제때 기억 나냐면서 타코야키를 내 입에 가져다주는데, 나도 모르게 귀엽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그 녀석도 제법 놀란 듯 그 뒤로 눈을 못 마주쳤었고.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듯 해서 기다리라고 하고 뛰쳐나왔다. 원래 가려던 곳들을 적어둔 메모를 찾았는데 어디에다 저장해뒀는지 못 찾겠어서, 기억을 되짚었다가 그 녀석이 꽃을 선물해줬던 걸 기억했다. 나의 기억력도 제법 믿을만 한 것 같다. 이게 아니라... 아무튼 그 뒤로 가까운 꽃이 보이는 가게를 들어가서,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길래 예쁜 파란 꽃을 하나 사갔다. 델피늄이랬나, 어쨌든 작은 꽃다발을 사들고 그 녀석 품에 안겨주고는 다시 아키타와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많이 지친 듯 머리를 기댄 줄도 모르고 졸길래 그냥 편히 자라고 몇번 쓰다듬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힘들었는지 굳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길래 몇번 더 쓰다듬어서 재우곤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내일은 학원에 나가서 레슨과 연습 곡 재검사를 받아야 하니 오늘 밤과 내일 밤은 못 찾아갈거란 말도 전하고, 잘 들어가라고 하고는 내일 아침에 나갈 준비를 끝냈다. 솔직히 정말 피곤하지만, 하루를 이렇게 곱씹어보니 다시금 즐거워져서 힘이 난다. 빨리 내일이 지나서 월요일이 되면 좋겠다.
9. 25 시라유키 미노루
날씨: 맑음 기분: 좋음
어제는 네 시가 다 돼서야 잠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다섯 시에 일어났는데 정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도 모르게 오전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만... 열 시에 눈을 뜨고 말았다. 깜짝 놀라서 얼른 얼굴을 씻고 어제 골라 둔 옷(막상 옷장을 열어 보니 멀쩡한 게 생각보다 별로 없어서 놀랐다. 대충 청바지에 흰 반팔 티를 입고 그 위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기로 했다)을 입고는 적당히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가려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열한 시에 선착장에서 보기로 했던 쇼우네이 녀석이 와 있어서... 솔직히 깜짝 놀랐다. 사실은 열한 시에 선착장으로 제대로 나올지도 조금 걱정됐는데,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간에 오다니. 게다가 얼핏 봐도 쫙 빼입은 것이 제법 신경 쓴 옷차림인 모양이던데, 준비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녀석이 함께 나가자며 손을 내밀어 오는데... 놀란데다 잠을 못 잔 머리가 멍해서 왜 집으로 찾아왔냐든가, 묻고 싶은 게 있었을 텐데도 뻗어 온 손을 그저 멍하니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멍한 채로 나서려다 녀석이 몸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라던가, 그런 말을 해서 퍼뜩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일정을 취소한다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긴장을 좀 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해 주고는 녀석의 손을 잡고 선착장까지 걸었다. 그런데 그 녀석, 분명 이것저것 준비를 해 왔다더니 생각보다 출구 방향이나 타야 할 배를 잘 못 찾는 거다. 그래서 조금 안내해 주었더니 별안간 녀석이 머리를 쓰다듬어 와서... 순간 정신이 멍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잠시 굳어 있었더니 녀석도 놀라 한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기도 했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사히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했지만 말이다.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는 전에 도시에 두어 번 왔던 기억을 되살려 어찌저찌 길을 찾았던 것 같다. 내가 가자고 했던 수족관부터 갔는데, 오랜만에 가 본 수족관에는 내 기억보다도 신기한 게 많아서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귀엽기도 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또 신기한 바다 생물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그만 녀석에게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해 버렸다. 수족관을 나와서 생각해 보니 왠지 나만 들떠 있었던 것 같아서 조금쯤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계속 수족관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중 돔처럼 된 곳을 지날 수 있었는데, 머리 위로 상어가 지나다니는 것이 신기해서 보고 있으니 녀석이 손을 잡아 왔다. 수족관 안에 사람이 많은 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두우니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를 하며 녀석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족관에서 손을 잡은 채로 물고기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연인 사이의 데이트 비슷한 것 같아져서 얼굴에 열이 조금 올랐던 것도 같다. 그것도 어둠 덕에 들키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바다 생물들을 원없이 보고 나가려는데 기념품점이 눈에 띄어 들르게 되었다. 쇼우네이 녀석이 별안간 아귀 열쇠고리를 사 달라고 하길래 저런 취향이었나 싶으면서도 일단 사 줬다. 기념 주화를 뽑자고도 하길래 몇 개쯤 뽑았었고. 어째 자연스레 내 지갑에서 계속 돈이 나가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기분 좋게 시간 보내자고 나온 자리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갔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왠지 상어 인형이 눈에 들어왔는데, 색도 뾰족한 이도 녀석을 닮은 것 같은데다 녀석이 전에 저를 닮지 않았냐며 상어 열쇠고리를 줬던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마음에 드는 티를 좀 냈었나 보다. 쇼우네이 녀석이 그걸 알아채고 사 줘서, 솔직히 조금 기뻤다. 기념 주화를 뽑은 답례라며 가볍게 사 줬는데 내가 그 행동에... 얼마나 의미를 두는지 녀석은 모를 거다.
수족관에 더 있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쳐서 일단 숨을 좀 돌리러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뭔가 준비해 둔 게 있는 모양이던데 내가 힘들어해서 못 간 것이 못내 아쉬운 기색이길래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다음에 나올 때는 이틀 전부터 쉬고 나오라느니 뭐라느니 헛소리를 하는 거다. 그런데 듣고 보니 다음이 또 있다는 것 같아서 조금 기뻤다. 사실 수족관에서 나 혼자 즐거워했던 것 같아서 다음에 또 나오기 싫어하면 어쩌나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이 또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어쩐지 석연찮은 대답을 들려 주던데, 또 기회가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 녀석의 눈치를 조금씩 살피게 되었는데 녀석이 별안간 음식을 먹여 달라고 하는 거다. 주변에 사람들도 있는데 먹여 달라고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녀석이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먹여 주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주변에 사람이 많다느니, 참 고집스러운 녀석이라느니, 그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다 보니 조금 전까지 고민하고 눈치를 보던 게 싹 잊혔다는 거다. 녀석이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할지 아닐지를 고민하는 대신 눈앞의 녀석이 요구하는 것에 응해 주기만 하면 되니 솔직히 말해 마음이 놓였다.
그 이후로는 여러 곳에 들렀던 것 같다. 내가 가자고 했던 사격장에도 갔고(지난번 축제 때 사격을 잘 못 한 건 운 탓이라며 핑계를 댔는데 괜히 내 실력 탓이었다는 사실만 밝혀지고 말았다), 거리의 상점 같은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서점 앞을 지날 때는 녀석이 서점 근처에도 가기 싫은 거냐며 제가 서점 쪽으로 걷겠다느니 뭐니 헛소리를 하길래 한 번 노려봤던 것도 같다. 그러고 나서는 녀석이 인형 뽑기 가게에 가자는 걸 거절했고(지난번에 돈을 탕진했던 게 떠올라 순간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배 시간이 가까워 와서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배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먹을 간식으로 나는 문어빵을, 녀석은 크레이프를 샀는데, 내가 한 입도 못 빼앗아먹는 걸 사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지 생크림에 초콜릿 시럽까지 듬뿍 뿌려진 것으로 골라 오기에 그만 눈을 돌려 버렸던 것도 같다. 보기만 해도 달아서 싫었다. 아무튼 사 온 문어빵을 먹다 보니 어쩐지 지난번 축제 생각이 났다. 그 때는 사귀기 전이었는데. 서로에게 마음은 있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재던 와중에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만은 지금과 같았던 건지. 그 때도 오늘처럼 함께 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간식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먹은 것도 문어빵이었지. 갑작스레 떠오른 추억에 괜히 흐뭇해져 그 때처럼 문어빵을 갈라 식히고는 녀석에게 먹여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어쩔 줄을 모르고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침묵만이 흐르는데 녀석이 갑자기 잠시 기다리라더니 어딘가로 가는 거다. 배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갑자기 어딜 간 건지. 괜히 초조해져 녀석이 간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녀석은 빈손이 아니었다. 푸른 꽃이 소담스레 핀 작은 꽃다발을 든 채로 내게 다가오더니 든 걸 그대로 내게 안겨 주었다. 그걸 받고 나니 며칠 전에 녀석에게 장미꽃 다발을 줬던 기억이 났다. 꽃다발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연인 사이 같아서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결코 나쁜 쪽으로는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징표 같아서 어쩐지 조금 들떠 버렸을 만큼.
어제 많이 못 잔 탓일까, 돌아오는 길에는 졸음이 쏟아져서 배에서 계속 잤던 것 같다. 어째 쇼우네이 녀석의 어깨에 기대서 잤던 것도 같고... 침이라도 안 흘렸으면 다행인데 말이다. 어찌됐든 배는 도착했고, 녀석은 나를 깨워서는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 줬다. 오늘 내일 밤에는 연습을 해야 해서 못 온다고 하길래 알았다며 녀석을 보냈다. 자고 가라고 하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다. 어젯밤 내내 방을 치운 건 좀 허무해져 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집에 돌아와서는 유리병에 물을 채워 녀석이 준 꽃을 꽂아 넣고, 벽장에 넣어 둔 인형을 다시 꺼내는 대신 녀석이 사 준 상어 인형을 침대에 놓아 두었다. 어째 내 방에 녀석과 관계된 물건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오늘 나가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녀석도 즐거워했던 것 같고, 괜히 다음이 있을 것만 같다며 기대하게 된다. 란에게 다음 주에도 산에는 못 가겠다고 말해 둬야 하나. 나중에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