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휴일 오후였다. 창문틈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눈이 부셨다. 느지막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 미노루가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걸어나왔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나오자마자 거실 소파가 보였다. 웬일로 먼저 일어나 앉아 있는 쇼우네이가 눈에 들어왔다. 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따스한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잘 잤어? 쇼우네이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 밖을 향해 있었다. 쇼우네이의 눈이 저를 향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미노루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너는 잘 잤냐며 조금은 상투적인 인사를 마주 건넸다.
익숙한 몸짓으로 걸어가 쇼우네이의 옆자리에 앉으려던 그 때 커피포트 끓는 소리가 났다. 쇼우네이가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올려 두었나 보다. 소파로 향하던 발걸음을 부엌으로 돌린 미노루가 흰 머그컵에 끓는 물을 졸졸 따랐다. 뜨거운 물이 담긴 컵에 커피가루를 떨어트리자 고소하고 씁쓸한 커피 향이 금세 거실을 가득 메우며 퍼졌다. 평온한 휴일 오후의 향기였다. 커피는 그다지 입에 대지 않지만 여유롭게 풍기는 향만은 마음에 들었다. 미노루는 컵 안에서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기분 좋게 흠향하며 쇼우네이가 앉은 거실 소파로 다가갔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 비슷한, 조금은 뻔한 인사가 돌아와야 할 때였다.
“나,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나지막이, 그러나 분명하게 들려온 쇼우네이의 말에 미노루는 순간 자리에 멈추어 섰다. 발이 땅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평화롭고 따스한 주말 오후에, 오롯이 둘만이 함께하는 평온한 시간에 쇼우네이는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그 내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아주 명확히 알아들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그 내용을 올바로 이해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언제고 태연하던 미노루조차 혼란을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컵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안에 담긴 액체가 불안하게 찰랑였다. 쇼우네이를 위해 준비한 커피였다. 그 커피만큼이나 미노루의 눈동자도 잘게, 그러나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그런 미노루를 가만히 바라보는 쇼우네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태연자약한 눈빛이었다. 쇼우네이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잔해서 자칫 별다른 내용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를테면 오늘은 날씨가 좋다거나, 오늘 아침은 맛있었다고 말할 법한 어조로 그는 미노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노루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눈빛과 목소리로 그는 길고 긴 사랑의 끝을 고했다.
“거짓말…….”
몇 초 내지는 몇 분간 말을 잃은 채 멈춰 서 있던 미노루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잇새에서는 꺼져가듯 힘 없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거짓말. 지금과 같은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노루의 가장 솔직한 심정인 한편으로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었으면,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저를 놀리려던 짓궂은 장난이라고 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쇼우네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그는 미노루의 바람을 산산이 부수는 말을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는 정말 사랑이 식은 것 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말했다. 미노루가 듣고 싶었던 것은은 멋쩍은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데도 쇼우네이는 금이 간 시디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미노루의 몸은 점점 더 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쨍그랑, 도자기 부서지는 맑은 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날카롭게 울렸다. 컵을 쥔 손에 힘이 풀린 미노루가 컵을 놓친 탓이었다. 상황을 쉽사리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미노루와는 달리 쇼우네이는 느릿하고도 침착한 몸짓으로 걸레를 꺼내 왔다. 조심해야지. 여전히 따스하면서도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는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큰 조각을 골라내어 버리고 쏟아진 커피와 미세한 조각들을 쓸어내어 걸레와 함께 쓰레기통에 넣었다. 미노루는 그런 쇼우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쇼우네이에게로 향한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 앞을 쇼우네이가 스쳐 지나가거나 했다.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듯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때 쇼우네이의 손가락이 미노루의 발등을 스쳤다. 굳은살이 박여 딱딱하면서도 따스한 손길이 의식을 조금이나마 현실로 돌려놓았다.
“괜찮아? 피 나는데.”
쇼우네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그 말대로 발등에는 피가 나고 있었다. 깨진 컵의 날카로운 단면이 발등을 스쳤나 보다. 상처가 난 곳을 몇 번쯤 매만진 쇼우네이가 조용히 일어나 안방으로 갔다. 얼핏 반창고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쇼우네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발등의 아린 통증과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던 쇼우네이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여린 심장을 꿰뚫고 비틀어 낸 상처가 타들어가듯 고통스러웠다. 가슴을 온통 메우는 묵직한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울컥, 목구멍으로 피를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토기가 치밀어올랐다. 미노루는 저도 모르게 화장실로 달려나가 변기를 붙잡고 엎어졌다. 웩, 소리까지 내며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속에서는 피도 음식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얼굴은 어느새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어느새 기척 없이 등 뒤로 다가온 쇼우네이가 미노루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 손길이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따스해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쇼우네이의 따스한 손길은 변함없었지만 그것은 미노루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오랜 습관처럼 배어든 따스함이 아팠고, 그 따스함에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문득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원래 쇼우네이는 미노루에게 그토록 큰 무게를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십여 년을 함께한 급우이면서도 조금 성가시고 안 맞는 사람일 뿐이었다. 이처럼 단순하던 둘의 관계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축제를 기점으로 다른 색채를 띠었다. 축제를 준비하는 동안 쇼우네이와 함께하며 그를 더 이해하게 되고, 가까워지고, 조금은 특별해졌다. 외국으로 떠날 거라든가 객사할 거라든가 하는 말을 장난스레 흘리는 그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조금쯤 저릿할 정도만큼은 각별했다. 쇼우네이는 늘상 장난처럼 말하면서도 정말로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겼고, 만일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많이 아쉬워질 것 같았다. 그 즈음의 미노루는 실은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이 머지않았고 정든 친구들은 하나둘 섬을 떠난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늦잠을 자다가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하굣길이나 동네에서도 언제고 친구들을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하루하루 사라져가는 것이 가슴 한구석을 저미듯 아렸다. 쇼우네이가 고백을 해 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의 여름이 한풀 꺾이고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별이 한 발자국 앞으로 성큼 다가온 때였다. 쇼우네이는 평소답지 않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저를 좋아한다는 한 마디를 전했다. 얼마나 떨었는지 눈가에 눈물도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 쇼우네이를 향한 제 감정이 어땠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노루는 쇼우네이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정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나날이 한 귀퉁이씩 떨어져나가던 그 때 쇼우네이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은, 말하자면 평온한 일상을 연장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쇼우네이와의 연애는 편안했다. 늘 붙어 있던 익숙한 얼굴이라 좋았다. 친구로 시작한 관계라지만 그들은 연인다운 행동도 제법 했다. 학창 시절에는 함께 등교를 하고, 일정을 마친 후에는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함께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거나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졸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림을 합쳤다. 눈을 뜨면 상대방이 눈앞에 있고, 이따금 포옹이나 키스 따위를 하고, 당연하다는 듯 서로의 옆에 다가가 기대 앉고, 그러다 눈이 맞으면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여느 커플이 그렇듯 보통의 연애를 했다. 사귄 지는 십삼 년, 함께 살기 시작한 지는 십 년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쇼우네이와의 관계도 안정되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도 그를 사랑한다 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노루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을 뿐이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존재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상대의 일상 속에 들어가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만 있으면 되었다. 거기서 이따금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을 수 있으면 족했다.
쇼우네이는 달랐다. 그에게 사랑이란 에너지이고 자극이었다. 뜨겁고 열렬해야만 했했다. 바라만 보아도 좋아서 견딜 수 없어야 했다. 쇼우네이에게 사랑과 편안함은 함께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항상 새롭고 설레고 두근거리는, 그 모든 자극의 총체를 그는 사랑이라 명했다. 둘은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같은 것을 두고도 미노루는 사랑이라 말하고 쇼우네이는 사랑이 아니라 말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쇼우네이와 미노루의 관계가 지금과 같은 끝을 맞은 데엔 특별한 계기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너무 오래 사귀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쇼우네이의 사랑은 식어 버렸다. 미노루가 아파하는 것은 그의 사랑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었다.
극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가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머지 둘 중 한 쪽 또는 둘 다의 사랑이 식어 버리는 일은 연인 사이에 빈번했다. 빈번한 만큼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어 왔고, 실제로 효과가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전해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쇼우네이와 미노루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끝을 맞았다. 둘에게는 깨어질 위기를 극복할 힘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의 사랑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었다. 둘의 연애는 길가에 수두룩한 보통의 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흔하디흔한 이별을 맞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둘의 연애는 마치 쇼우네이가 미노루의 손을 붙잡은 모양새였다. 더 먼저, 더 많이 사랑한 쇼우네이가 계속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관계였다. 그런 쇼우네이가 손을 놓아 버리자 그대로 깨어져 버렸다.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간절하지 않은 연애를 하던 미노루는 쇼우네이를 붙잡지 못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쇼우네이의 온기가 서서히 등 뒤를 떠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는 미노루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조금은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은 달래 주기에도 지칠 만큼 오랫동안 토악질을 했나 보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금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억지로 눌러 삼킨 미노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담긴 쇼우네이의 모습이 먹먹하게 흐렸다. “내 짐은 다 버려도 돼.” 쇼우네이는 흐릿한 얼굴로 또다시 잔인한 말을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목소리가 다시금 끝이 왔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 안 곳곳에 자리한 쇼우네이의 물건은 그와 함께한 시간이자 추억이었다. 그것을 짐이라 칭하는 쇼우네이의 말이 건조하다못해 날카로웠다. 쇼우네이는 그런 미노루와 상관없이 발걸음을 뗐다. 잘 있어, 안녕.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쇼우네이가 조용히 미노루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무심한 발소리 몇 번, 익숙한 도어락 소리, 그리고 정적.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따스하던 집 안이 한순간에 싸늘하리만치 조용해졌다. 빈 속을 억지로 게워내던 미노루가 토하기를 멈추고 털썩 주저앉았다. 잔인하리만치 잔잔하게 찾아온 이별이 미노루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폭풍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도통 울 줄을 모르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평범했고, 그래서 소중했던 일상의 커다란 축이 미노루의 인생 밖으로 떠나가 버렸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미노루를 휘감았다. 쇼우네이의 몸은 이미 미노루의 집을 떠났지만 그를 마음에서도 떠나보내려면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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