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하루 틈의 고백

이가미 2022. 8. 21. 22:52
……미안, 쇼우네이.
지금 당장은 답을 들려 주지 못하겠어. 내 감정을 확신할 수가 없어서.
난 우리의 관계에서 불확실한 요소는 최대한 없애 두고 싶어.
그러니까 내게 시간을 조금 줄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쇼우네이가 조심스레 내게 진심을 전해 온 그 때, 나 스스로를 조금 원망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잘 하고 감정을 다루는 데도 능숙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때의 나는 영락없는 겁쟁이였다. 지독하게도 서툴고, 그런 주제에 두려운 것도 많아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겁쟁이. 그런 나는 쇼우네이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었음에도 그에 걸맞은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도망쳐 버렸다. 녀석을 그 자리에 세워 둔 채로.
 사실 내 앞에도 단 한 걸음만이 남아 있었다. 쇼우네이를 향한 나의 감정도 분명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는 쇼우네이만큼의 결단력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얼마 전부터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이 감정을 깊이 생각하고 정의하는 것을 포기한 채 지금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쇼우네이에게는 더 이상 친구 사이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둔 채로.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친구도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쇼우네이와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해 놓고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는 확정짓지 않다니, 대책없는 데도 정도가 있지.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자조가 물밀듯이 올라왔지만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새는 없다. 답을 내놓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쇼우네이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분명 우리의 지난 날들을 살펴볼 필요는 있었지만 지나치게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사양이다.
 문득 내가 확답을 주저하는 동안 쇼우네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울고 있지 않을까. 불과 몇십 분 전, 쇼우네이는 내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로 고백을 해 왔다. 자기 쪽을 보지 말라며 고개를 돌렸던가. 쇼우네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말은 들어 줄 수 없었다. 그야 녀석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늘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건만. 그 녀석에게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한때는 녀석의 약한 모습을 찾아 놀리고 싶어했던 적이 있지만 눈물에 얼룩져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보고 싶기는커녕 그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다. 차라리 늘 하던 대로 녀석을 달래고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 정도로.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리 덮고 지나가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녀석에게는 꽤나 모질게 들릴 만한 말을 남긴 채 도망치다시피 떠나왔었지. 그런 나 때문에 쇼우네이가 여지껏 눈물지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편치 않았지만 녀석도 금세 잊고 눈물을 그쳤겠지, 라며 마냥 개운치만은 않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가벼운 녀석이니까, 지금쯤은 다 털어내고 평소처럼 지내고 있을 거야. 나 자신을 그리 안심시키는 와중에도 가슴 한구석에 납덩이가 내려앉은 듯한 무게감에 답답하기만 하다. 외면하기에는 심히 마음이 쓰였다.
 정리되지 않고 찜찜하게만 남은 문제를 떠안은 채 나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에서의 작업은 분명 수 년간 반복해 왔던 것들임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몇 번이고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같은 실수로 손님에게 사과하는 일이 세 번째 반복되었을 때쯤, 부모님은 내게 오늘 하루 일을 쉬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바쁜 시간에 부모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을 보면 내가 어지간히도 얼빠져 있었던 것이겠지. 당장 사과드리고 지금부터 잘 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했음에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해도 지지 않은 시간에 목욕탕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저녁 노을을 보며 퇴근하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 때문일까, 평소와는 달리 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생각에 잠길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몸이 느긋해지고서야 조금 전에 손님에게 맞은 뺨이 묵직한 통증을 보내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별 일이 다 있다. 그마저도 몇 시간 전의 일에 비하면 사소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서일까, 손님에게 뺨을 맞을 때도 별다른 생각은 않았던 것 같다. 아, 또 실수를 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이겠지.
 바른대로 털어놓자면 쇼우네이의 고백은 내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헷갈린다는 이유만으로 깊은 곳에 묻어 두던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표가 달려 끌어올려진 셈이었다. 수면에 커다란 돌을 떨어뜨린 듯 마음에 커다란 파동이 일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그 표정이나 목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당장에라도 거절당할 것처럼 굴다니, 무신경한 데도 정도가 있다. 나 역시도 녀석에게 -비록 아직 정의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새어나갔을 텐데, 내가 좋다던 녀석은 왜 그걸 모르는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사고의 진척이 없어 재빨리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정리해야 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주의를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뒤늦게 아파 오는 뺨을 살살 문지르며 정리되지 않은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먼저는 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현재 대단히 혼란스럽기도 하고, 쇼우네이에게 한시라도 빨리 대답을 들려 주고 싶어서 이것 이외의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왜 쇼우네이에게 빨리 답해 주고 싶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도 -앞의 것보다는 조금 어려웠지만-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을 초조함이나 슬픔에 빠지게 둔 채로 방치하고 싶지 않아서. 그럼 대체 왜, 녀석이 슬프지 않았으면 하는 걸까. 왜 당장에라도 가서 쇼우네이가 듣고 싶어할 만한 말을 들려 주고 품에 안아 주고 싶은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깔끔하게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열쇠일 텐데. 분명 지금의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일 텐데도 쉬이 이것이 답이라며 꺼내 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겠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쯤 밤하늘이 저녁 노을을 집어삼키기 시작해 나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저녁밥을 먹을 생각조차 못한 채 침대에 누웠던 것 같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간간이 들어 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텔레비전이나 대중 가요에서, 학교에서나 목욕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누던 사랑 이야기.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였기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오늘따라 그 내용이 머릿속에 콕콕 박힌다. 떨어져 있으면 그립다고 했었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고도 했었지. 품에 안고 싶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외면해 왔던 말 하나하나가 나의 상태와 지독하리만치 비슷해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당장 쇼우네이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은 채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애써 부정해 왔던 99퍼센트의 확신에 1퍼센트가 더해진 기분이었다. 이쯤 되면 부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찾았던 것 같다. 겨우 찾은 휴대전화를 들어 최근에 가장 많이 눌렀던 번호들로 자연스레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
 
 착신음이 열 번쯤 울렸을까. 녀석이 받지 않아 전화를 끊고는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 버렸다. 무언가 하고 있나 싶어 삼십 분쯤 후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삼십 분의 간격을 두고 전화를 걸었을 때 시계는 이미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녀석, 분명 밤에는 산책을 즐긴다고 했는데.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느긋하게 산책을 할 리 없었다. 뭘 하고 있을지 떠올려 보던 중 녀석이 나의 전화를 일부러 안 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겁쟁이 같으니. 조금 전에 녀석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나 온 내가 할 말이 못 되는 줄 알면서도 괜히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던지며 나는 다시 한 번 침대 위에 던져 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너희 집 앞 공원.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 두 문장을 써내는 데도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녀석이 전화를 받지 않는데 어찌하랴. 나름대로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면 나오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에 도박 삼아 보내 본 메시지였다. 남은 것은 결정을 쇼우네이에게 맡긴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조금 답답한 마음을 눌러담은 채 머리를 두어 번 털고 집 밖으로 나섰다.
 
 언젠가 사랑에 빠지면 앞뒤 가리지 않게 된다고 들은 것도 같다. 그것이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을 줄이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 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을 열자마자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불빛 없는 거리.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오늘따라 풀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날은 또 왜 이리 맑은지. 드넓은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까맣기만 했다. 온통 새까만, 끝이 보이지 않는 허공이 눈에 들어오자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한 걸음을 딛어 문 밖으로 나왔지만 차마 등 뒤로 현관문을 닫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집 안에서 나오는 불빛마저 차단해 버리면 완전한 어둠이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달달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메시지를 보내 내일 만나자고 할까, 몇 초간 그런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기만 했다. 그 사이 조금씩 배어나와 흐르던 식은땀이 옷을 적셔들어가기 시작했다. 내일도 학교에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주머니 속 휴대전화로 손을 뻗던 그 때, 저를 두고 가지 말라던 쇼우네이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물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지. 이미 나는 그 모습으로부터 한 번 등을 돌렸다. 두 번은 안 된다. 그 이상 망설임이 뻗어나가기 전에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는 한 걸음씩 집에서 멀어졌다.
 그 뒤로 공원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최대한 땅만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했을 뿐, 달리 어떤 생각도 하려 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유독 어둡고 고요하기만 한지. 빨리 가서 쇼우네이를 만나지 않으면 도저히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아서 걸음에 박차를 가하다 못해 나중에는 뛰다시피했던 것 같다. 그 때문일까, 공원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느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달뜬 숨이 사그라들기 전에 쇼우네이를 만나고 싶어서 헐떡임에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며 공원 내부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참을 찾아다녔지만 쇼우네이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이 안정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공원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쇼우……네이."
 
 이름을 불러 보아도 대답은 없다.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끝없는 어둠이 나를 내리누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피부 깊숙이 스미는 공허감에 소름이 끼쳐 양 팔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문득 쇼우네이가 안 나오면 어쩌지, 라는 하나의 가능성이 내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당초의 계획대로라면 쇼우네이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하룻밤을 꼬박 공원에서 지새운 뒤 등교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리 마음먹었을 텐데. 내 양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은 밤하늘은 나의 굳은 결심을 쉽게도 흔들어 놓았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까. 같은 자리를 맴돌며 몇 번이나 공원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던 것도 같다. 한참을 고민하며 무의미하게 힘을 빼던 끝에 나의 나약함이 승리를 거두었다. 돌아가는 길에 연락해야겠다며 공원을 나서려던 찰나, 쇼우네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아한다 해도 계속 곁에 있어 줄 거냐고 했었지. 얄밉고 비겁한 녀석,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아니라고 해. 마음 같아서는 녀석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대도 곁에 있고 싶은데. 그 말을 한 뒤 곁에 있어 줄 거냐던 녀석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만 있었다. 괘씸하긴, 내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고. 잘못 없는 녀석에게 속으로 실컷 분풀이를 하다 문득 깨달았다. 짜증 섞인 미사여구 사이에 감춰진 진심은 실로 단순했던 것을. 나는 그저 녀석이 보고 싶었던 거였다.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것이 서운했던 거였고. 우습게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마음이 내가 녀석을 아낀다는 방증이겠지. 이렇게 단순한 것을 세간의 이야기를 빌려 유추해 내다니, 나도 적잖이 어리석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 이제는 정말 부인할 수 없다. 남의 말을 빌려 표현할 수도, 다른 단어로 에둘러 말할 여유도 없다. 나는 녀석을 좋아한다. 내 모든 평정과 여유를 잃어버릴 만큼. 정신조차 안 차려질 만큼. 딱 그 만큼.
 이제는 정말 물러날 수 없었다.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확신한 이상 결착을 지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건 사실상 핑계고, 그저 녀석을 보고 싶었다. 얼른 만나서 나의 마음을 들려 주고, 또 뭘 하고 싶었더라. 그래, 품에 안은 다음 쓰다듬어도 주고. 밤하늘 아래 있는 것이 싫다고 어리광부릴 때가 아니었다. 잘은 몰라도 지금 녀석을 덮친 건 내가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암흑과 불안감일 거다. 그런 생각에 공원에 남으려는데, 막상 기다리려 하니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탁 트인 공원 내에는 밤공기로부터 내 몸 하나 숨길 장소도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막히는 적막을 쫓으려 괜히 부산스레 움직이던 중 공원 내의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띄었다. 놀이터 구석에 위치한 작은 어린이용 돔도 함께. 모든 것이 아득히 펼쳐져 있기만 한 개방적인 이 곳에서 유일하게 천장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것저것 재지 않고 놀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되는 거리나마 달려서인지 다시금 호흡이 흐트러져서 돔에 들어갔을 때는 숨을 제법 헐떡이고 있었다. 쭈그려 앉고도 머리를 숙여야 하는 작은 돔 안에 나의 거친 숨소리가 반사되어 울렸다. 좁은 곳에 몸을 구긴 채로 들어가 있으니 차라리 진정이 된다. 저 끝없는 하늘로부터 숨은 채 나의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맨바닥에서는 습기가 바지를 타고 올라오고 팔에 닿은 돔의 벽면은 조금 차가웠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몇 시간 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양심의 가책을 덜기에 괜찮은 것도 같았다. 쇼우네이와의 관계를 방치해 뒀다가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죗값으로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내가 네게 준 초조함이나 불안함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겠지만 이 정도로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쇼우네이에게 멋대로 말을 붙이다 보니 어느새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낮에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던 탓일까, 긴장이 풀리자 수마가 덮쳐 왔다. 휴대전화를 열어 확인하니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딱딱한 바닥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은 자세가 불편하기 그지없었음에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순식간에 잠에 빠진 것 같다.
 잠든 채로 얼마나 있었을까, 의식 너머로 아득한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에 설핏 눈을 떴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기도,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는지 점점 가까워져 왔다. 허우적대듯 주변을 더듬거리며 감각을 조금씩 되찾아가자 소리가 더욱 뚜렷해졌다. 시라유키, 그렇게 들린 것 같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소리가 멀어지기 전에 내가 여기 있음을 알려야 하는데 조금 전까지 단잠에 빠져 있던 목은 잠길 대로 잠겨 목소리를 제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급히 나가려고 일어서다 그대로 돔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게다가 좁은 곳에 웅크린 채 졸고 있던 탓에 -정확히는 몰라도 몇십 분은 흐른 것 같았다- 다리에 쉬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쥔 채 성급히 나가려다 힘이 풀린 다리가 꼬여 넘어져 그만 엉금엉금 기어나가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머리를 박고 부산을 떨던 내 소리가 새어나간 것일까, 넘어진 채로 고개를 들자 내 쪽을 내려다보는 쇼우네이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분명 지금의 나는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겠지. 눈앞에 있는 녀석에게 발견되기라도 하면 배꼽을 잡고 웃어젖힐 정도로. 그것도 모자라 하루종일 놀림감이 될 정도로. 그런데도 녀석은 웃지 않았다. 녀석은 서 있고 나는 돔 입구에 엎드린 채로 두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나였다.
 
"……쇼우네이."
 
 아, 어쩜 내 편은 하나도 없는지. 이럴 때 겨우 쥐어짠 목소리마저 볼품없이 갈라져 나왔다. 지금 쇼우네이의 기분은 어떨까. 우스울까, 꼴 좋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이없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제 진심 어린 고백을 피해 도망친 상대가 어정쩡한 자세로 넘어진 채 흉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저를 부르고 있었다. 확신을 가질 때까지 시간을 달라며 폼은 있는 대로 다 잡더니 실상은 별 거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런 제 짐작과는 달리 진지한 듯도 무표정한 듯도 한 쇼우네이의 얼굴은 감정의 변화를 내비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만히 있었을까, 보다못한 녀석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한 손을 내민 채 자세를 낮추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한숨을 쉰다는 것은 부정적인 신호일 텐데. 그런데도 한숨을 쉼으로써 녀석의 표정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마음이 놓이는 나는 이상한 것일까. 녀석이 내민 손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그런 것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 다시금 -조금 전보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허공을 헤매던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녀석의 힘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모양새가 되었다.
 
"왜 그러고 있어."
 
 그러게, 내가 왜 이러고 있담. 그것이 녀석의 물음에 내가 줄 수 있는 답의 전부였으나 쉬이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실제로도 대답을 들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닌지 녀석은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툭툭 털었다. 아마 오는 길에, 또는 내 손을 잡아 끄는 중에 먼지라도 묻었던 것이겠지. 그리 이해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음에도 녀석이 나의 손을 잡았던 기억을 털어내는 것만 같아 괜스레 울적해졌다. 나의 과한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는데도. 그 때문인가, 입을 열어 나온 목소리에 조금 물기가 배어든 것도 같았다.
 
"아까 전화했을 때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좀…… 이것저것."
 
그랬구나, 녀석이 뭐라 말하든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던 나는 실제로도 그 말을 꺼내 놓았다. 이 이상 추궁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음을 인정하는 말. 내게 아홉 시에서 열 시쯤 녀석이 무엇을 했는지 캐물을 권리 따위는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나는 녀석의 마음을 덮어둔 채 떠나 온 사람이었으니까. 이 순간만큼은 녀석 앞에서 죄인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할 말 있으면 빨리 끝내, 그리 덧붙이는 녀석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 듯했던 건 나의 기분 탓일까. 다시금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확인하고서야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기라도 한 듯 녀석의 표정은 결연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두 번씩이나 봐 버렸다. 두 번 다 나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저열한 인간성의 소유자인가. 내가 조금 겁이 나고 확신이 안 선다고 해서 상황을 회피하기나 하다니, 최악이다. 최악임을 알기에 더더욱 미룰 수 없었다. 나 역시 나름의 각오를 한 채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마 녀석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다. 결연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얼굴.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미약하게 흔들리는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몇 초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본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쇼우네이, 나..."
"……."
 
 조금 전까지 눈을 마주하던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녀석은 내가 입을 열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찡그린 얼굴 하며, 내 얼굴 따위는 보지 않겠다는 듯 쌩 돌아간 고개 하며. 어떻게 보아도 듣기 싫다는 신호였다. 조금 초조해져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역시도 내가 초래한 일인 것을. 몇 시간 전의 일을 후회하고 반성하던 그 때 녀석이 작은 소리로 한 마디를 꺼내 왔다.
 
"어차피 찰 거면 빨리 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차일 걸 알고 있으니 빨리 끝내라고? 녀석의 그 말에 별안간 내 마음속에 치솟은 것은 울분이었다. 녀석을 의식하기 시작한 뒤부터 조금씩 쌓여 오던, 그럼에도 누르고 눌러 지금 이 순간까지 참아 왔던 울분. 그것이 조금 전까지 마음 한가운데를 누르던 죄악감과 초조함을 순식간에 밀어내고는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 전부터 반해 있었는데 언제까지고 눈치채 주지도 않고. 언제나,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눈으로 가벼운 말을 꺼내 놓기나 하더니 일이 이렇게 된 지금까지도 내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고. 혼자 고백해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정작 자기는 내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안 좋은 쪽으로 속단하기나 하고. 조금만 더 나를 주의 깊게 봐 줬다면 빨리 차라는 말따윈 나오지 않았을 텐데. 답답함과 함께 여태까지의 설움이 단번에 밀고 올라오는 듯 가슴이 뜨겁고 묵직한 열기에 잠식되어 갔다. 부풀어가는 감정에 가슴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조여 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는 있는 대로 내지르듯 소리쳤다.
 
"좀 들어 보라니까! 답답하네 진짜!"
 
 바보 아니냐? 힘을 줘 그리 덧붙이자 녀석의 눈이 의외라는 듯 동그랗게 뜨인다. 아마 내게서 이런 모습을 볼 줄은 상상조차 못 한 것이겠지. 저를 향한 나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을 테니까. 그런 주제에 짓는 놀란 얼굴따위 어이가 없어서 못 봐 주겠다. 아마 내 표정에도 그런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리라.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놀라서 얼이 빠진 듯한 녀석이 조금 낯선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녀석의 사정을 봐 줄 생각은 없다.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조금 전처럼 분이 섞인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여태껏 괜히 너랑 붙어 다닌 줄 아냐? 너랑 있어서 좋을 게 하나 없는데 내가 왜! 오늘만 해도 너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알아? 전부터 멋대로 내 마음을 휘젓더니 오늘 갑자기 고백하기나 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일에 집중도 하나도 안 되고, 실수해서 일하던 도중에 쫓겨났고, 집에 가서도 머리가 터지도록 네 생각만 했고, 이 밤중에 너를 보러 찾아와서 기다리기까지 했다고! 그게 다인 줄 알아? 혼란스럽다가도 짜증나고, 짜증이 나다가도 슬프고, 슬프다가도 화가 나고…… 마음이 제멋대로 휙휙 바뀌어서 미칠 것 같다고! 오늘 하루종일 너 때문에 일이 안 풀렸어! 너랑 엮이면 엄청 피곤하기만 해! 그런데, 그렇게 곤란하기만 한데도……."
 
 네가 좋은 걸 어떡해…….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덧붙이듯 겨우 전한 진심은 작고 미약하기만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얼굴 전체를 화끈하게 뒤덮는 열기도, 가슴 안쪽에서부터 피어올라 어디로든 뻗어나갈 것만 같은 기묘한 간질거림도. 모두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은 꽤나 볼 만할 거다. 얼굴도 홍당무처럼 새빨갛겠지. 처음으로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가가 조금씩 시큰시큰해 오더니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조금씩 고여 갔다. 아주 조금씩 차오르던 눈물은 이윽고 무게를 이기지 못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마도 여러 가지가 뒤섞인 눈물일 거다. 그 안에는 그간 쌓여만 가고 풀릴 줄을 몰랐던 설움도, 끝끝내 내팽개쳐진 나의 자존심도 녹아 있으리라.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무참히 꺾여나가는 순간이었다. 수 년간 노력해 쌓아 온 능숙한 모습도, 평온하고 배짱 좋은 성격도, 여유 넘치는 태도도 전부. 지금 이 순간 녀석 앞에서 탈탈 털어내어 전부 버렸다. 남은 건 어떻게 해도 버릴 수 없던 마지막 자존심마저 놓은 채 울고 있는 작고 초라한 모습뿐이었다. 이런 나를 보면 속이 시원하려나. 그런 생각 따위를 하고 있을 때 쇼우네이가 내게 다가와 양 팔을 벌려 나를 감싸 안았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뿌리칠 힘도 없어 미끄러지듯 녀석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 큰 녀석도 아닌데 나를 감싸는 녀석의 품은 왜 이리 넓고도 따뜻한지. 아무런 말도 않으며 내 등에 두른 손은 든든하고 편안하기만 했다. 그간 쌓여 왔던 응어리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풀릴 만큼. 그 탓일까,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녀석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큰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녀석을 안아 주려고 했는데, 반대로 녀석에게 안긴 채 정신을 못 차리는 나야말로 바보 같다.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고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훌쩍이는 모양새도 제법 흉할 거다. 쇼우네이는 그런 나를 놀리는 대신 아무 말 없이 토닥여 주었다. 쇼우네이의 품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흐를 눈물조차 남지 않았는지 주체할 수 없던 눈물이 겨우 멈췄다. 훌쩍이다못해 숨을 헐떡이고 있지만 않았다면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고 봐도 좋을 터였다. 어찌나 울어댔는지 퉁퉁 부은 눈꺼풀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달라붙었다 끈적이며 떨어졌고 눈물자국에 엉망이 된 볼은 눈물이 말라가며 조금씩 따가워졌다. 눈물이 멈춘 후에도 녀석은 내가 훌쩍임을 멈추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분쯤 더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호흡이 잦아들자 쇼우네이가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냐며 나지막이 침묵을 깼다. 조용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던 것도 같다. 이 이상 쇼우네이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있기도 민망해 녀석의 팔을 슬그머니 풀고는 몸을 뒤로 조금 빼 나왔다. 눈물자욱이 얼룩덜룩한 얼굴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도 분명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만 어두우니 괜찮겠지. 밤하늘이 나를 뒤덮어 어둠 속으로 숨겨 준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미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니, 사실 이제 와서는 상관없으려나. 이미 나는 녀석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 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틀어쥔 채 놓지 않으려던 것들을 금세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내 마음을 어지러이 흔들어 손아귀의 힘이 빠지게 한 뒤 결국 놓게 만든다. 체면도 자존심도 모두 땅에 떨어진 채로 어디쯤 굴러다니고 있겠지. 내 체면을 차리기 위해 녀석의 시선을 피하려던 것을 그만두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렇게 다시 보니 참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여태껏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더 빨리 허물을 한 꺼풀 벗겨낸 시선으로 녀석을 봐 줄 걸. 녀석에게 푹 빠진 내 모습을 제대로 봐 주지 않았다며 울분을 터뜨렸던 나 역시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쇼우네이도, 나도. 그럼에도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다. 여태 편협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던 나를 몇 번이고 받아들여 준 쇼우네이처럼.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신기하리만치 편안해졌다.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실수쯤은 더 해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도 용서받지 않을까. 안도감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은 채 녀석에게 나지막이 한 마디를 건넸다.
 
"다 너 때문이야."
"응?"
 
앞뒤를 모조리 잘라먹은 내 말에 녀석이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다. 오늘 처음 보여주는, 녀석의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우스우면서도 평소답지 않던 무게감이 걷힌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더없이 따뜻해져 왔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잘게 키득이고 있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웃음기가 잦아든 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녀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 때문에 다 엉망이 됐잖아. 이상하게 네 앞에만 가면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어. 괜히 심장이 뛰어서 모든 게 조심스러워지기만 해. 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크게 다가와서 정신도 못 차리겠고 여유도 하나도 없어."
"응."
"그토록 버리려 했는데도 안 버려지던 자존심도 다 놨어. 네게 얕보이지는 않을까 하나하나 재 가면서 행동하던 것도 이제는 못 해."
"……응."
"너랑 있으면 머리를 쓸 수가 없어. 계산이 안 돌아가. 바보가 돼 버린 거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 건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새삼 사람들의 말이 실감이 났다. 얼마 전부터 쇼우네이를 떠올리기만 하면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 손에 쥔 것을 내어 주게 된다. 한두 번씩 져 주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녀석에게 넘겨준 것이 몇 가지나 될까.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 마디라도 더 나눠 보려고 조금쯤은 비굴함을 참았던 것도,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아무 이득도 없는 약속을 잡았던 것도. 시간과 돈, 마음 모두 빼앗긴 것이다. 아니, 줘 버렸다.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대가로 녀석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하등의 이점이 없는 조건임이 분명했으나 어느새 나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고 내가 가진 것들을 퍼내고 있었다. 이런 거래는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몇 년간 견고히 쌓아 온 나의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영락없이 녀석을 얻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 자신을 넘겨준 꼴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나를 책임지라고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녀석에게 넘어가 버렸으니까.
 
"……평생?"
"응, 평생 옆에 있어."
 
평생이라. 나의 인생을 저당잡힘과 동시에 쇼우네이의 남은 생애 전부를 붙잡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 버린 것이 아닌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제 와서는 상관없었다. 이미 나는 내 모든 시간을 녀석과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평생이라는 말의 무거운 울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쇼우네이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띠는 것을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통했다. 순간 녀석과 나의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바로 몇 초 전에 평생을 함께하자는 무거운 족쇄를 나눠 찼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이나 홀가분한 웃음이었다.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쇼우네이가 내 바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와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 맞지?"
"응…… 그렇네."
 
이제 정말 사귀는 게 맞냐며 물어 오는 쇼우네이의 목소리에 평소와 같은 활기가 조금 깃들어 있어 마음이 놓였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런 것 같다든가 모른다든가, 어떤 식으로든 에둘러 말했을 터였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헷갈릴 여지가 없을 정도로 똑똑히 알려 주고 싶었다. 쇼우네이를 향한 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색채를 띠며 얼마나 달콤한 향을 풍기는지. 이를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순간 쇼우네이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어 팔을 벌려 녀석의 허리에 둘렀다. 녀석을 만나기 전에 녀석을 품에 안아 주겠다고 했는데, 많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했으니 된 거다. 내 몸짓에 당황한 듯 몇 초간 빳빳이 굳어 있던 쇼우네이도 이내 제 팔로 내 등을 감싸 안았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다. 역시 서로를 안고 있는 것이 좋다. 지금처럼 체온과 마음을 나눌 수 있으니.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쇼우네이의 고백을 시작으로 서로가 조금씩 엇갈리며 알게 모르게 상대를 힘들게 했던 하루.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렇다. 그래도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솔직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쇼우네이와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 수없이 했던 마음고생이 씻겨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보다.
 물론 앞으로의 나날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말하자면 하루와 하루 사이의 틈새 같은 거다. 자정이 지나 다음날이 되었음에도 하루를 끝내지 않고 억지로 열어 놓은, 해가 뜨면 녹아 없어지고 마는 시간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면 어리석은 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버렸던 모든 허물들을 주워담아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자존심을 세우고 평정을 가장할 것이다. 녀석에게 마음을 한 칸씩 내어 주고 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날을 세우거나 때로는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다. 모두가 한 번쯤은 저지르고, 그런 만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일이기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실수를 해도 쇼우네이와 나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만약, 정말 만약에 서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가 온다면 다시 이 순간을 떠올리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솔직했었던,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던 순간. 거짓도 꾸밈도 없었던 이 시간들은 새로이 떠오른 아침 햇살에 흩어져 사라지겠지만 함께 확인한 서로의 진심은 누군가 기억하는 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 둘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을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기를. 그런 소원을 빌며 마음 속 사진첩에 이 순간의 기억을 담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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