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가미 2022. 1. 1. 01:40
"……."
 
 시라유키 미노루가 입을 열지 않은 지 약 삼십 분이 지났다. 원래부터 그다지 수다쟁이는 아니었던 그가 삼십 분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애시당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처럼 그의 연인인 아카츠키 쇼우네이와 함께하는 여행 중, 그것도 구태여 찾아 걸음한 유명 관광 명소인 빌딩의 꼭대기에서 삼십 분간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모로 보나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침묵을 지키는 것 이상의 감정적인 신호를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보다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굳게 앙다문 입술, 날카롭게 툭툭 끊어지는 몸짓이 그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설명해 주었다. 한 마디로 그는 완전히 토라진 것이다.
 본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기 마련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시라유키 미노루가 아카츠키 쇼우네이를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빌딩의 전망대로 데려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많은 가족들과 연인들이 찾는 그곳에서라면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일박 이일의 여행 일정 중 첫 장소로 선택했건만. 그간의 크고작은 앙금을 풀고 조금 더 가까워지리라는 기대감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다툼 끝에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묘한 거리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이 남았을 뿐이다. 분명 전망대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하나였는데 어쩌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지저분한 형태로 갈라져 버린 건지. 가슴 한편에 원망을 품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쇼우네이 쪽을 흘겨보았다. 우연히 쇼우네이 또한 미노루 쪽으로 시선을 옮겼던 것인지 둘의 눈이 일순간 마주쳤다. 그러나 잠깐의 마주침도 잠시, 흥, 하는 콧방귀와 함께 둘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가고 시선은 언제 마주쳤냐는 듯 한순간에 엇갈려 버렸다. 서운한 마음을 추스르고 먼저 말을 건네 볼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고개를 돌려 쇼우네이와 눈이 몇 번 마주칠 적마다 한 줄기 고민이 스쳐지났으나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금 저를 등지는 쇼우네이의 모습에 실낱 같던 의지는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삼십 분이 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렀다. 자릿세 대신으로 주문한 녹차가 손 안에서 식어가는 동안에도 쇼우네이와의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 안에 톡 털어넣은 마지막 한 모금의 녹차가 혀끝에 아릿하게 떫은맛을 남겼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쇼우네이와 미노루가 함께 전망대에 오른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다. 그러잖아도 들뜬 둘의 마음을 한껏 고조시키는 통유리 창문의 전망대에서 함께 도시의 야경을 두 눈 가득 담을 때만 해도 둘 사이는 분명 평온함을 넘어 화기애애하기까지 했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별천지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들이 몇 시간 뒤면 열아홉 살이나 된다는 사실마저 잊고- 창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별천지 같은 창 밖의 풍경을 보자 더욱 기분이 좋아진 것은 덤이었다. 점점이 미세하게 빛나던 별을 땅에 수놓은 듯 사방이 휘황찬란하게 번쩍였다. 어둠을 느낄 틈조차 없이 다닥다닥 붙은 노란 가로등 불빛과 거리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색색의 네온사인, 도로의 한 면은 노랗게, 다른 한 면은 빨갛게 물들이는 자동차의 물결, 미처 귀가하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듯 창마다 비쳐나오는 건물의 불빛까지. 하늘과 맞닿은 해발 수백 미터 위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개개의 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넋이 나갈 듯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 둘의 얼굴에서도 내내 경탄의 빛이 떠나지 않았다. 온 도시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에 나란히 붙어 불빛 하나하나에 신기하다는 듯 반응하면서도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우리가 배에서 내린 선착장이라든가 저 곳은 유독 밝아 보인다든가 하는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노루는 때때로 고개를 돌려 쇼우네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도시 전체의 불빛을 하나로 모아 가두기라도 한 듯 번쩍이는 눈동자에서 평소보다도 강렬한 생기를 느꼈던 것도 같다.
 마냥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킨 것은 미노루의 한 마디였다. 선착장을 비롯한 도시 곳곳을 가리키던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킨 미노루가 따스한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쇼우네이, 저기 저 산 보여?"
"저 어두운 데 말하는 거냐?"
"응, 저기. 어두워서 오히려 눈에 띄지?"
 
 쇼우네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눈은 산을 향해 있으면서도 제 옆에 선 쇼우네이가 고개를 주억이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미노루가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저 산을 오를 거야. 다섯 시에 일어날 수 있겠어?"
 
 두 번째 질문에는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미노루가 예상한 일이었다. 여섯 시 사십 분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하던 쇼우네이에게 다섯 시에 일어나라는 말은 선뜻 받아들이기 망설여질 터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향하던 시선을 쇼우네이에게로 돌리자 예상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하는 쇼우네이가 미노루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쇼우네이에게 미노루가 한 마디 덧붙였다.
 
"힘든 건 이해해. 그래도 내일은 새해 첫 날이잖아. 일찍 일어나서 산에 오르다 보면 머리가 맑아질 거야. 일출도 볼 수 있고."
"이러려고 네가 여행 계획을 세운다고 한 거냐……."
 
 쇼우네이의 힘 없는 볼멘소리에 미노루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분명 연말 여행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한 것도, 실제로 세워서 실행에 옮기려던 것도 미노루 본인이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쇼우네이의 의사에 다소 반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해 첫 날을 맞이하는 특별한 일정이니 어느 정도는 감안하리라 믿었는데, 그마저도 제 억지였던 모양이었다. 미안함과 아주 약간의 서운함을 한데 억누른 미노루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안 좋게 받아들일 건 없잖아. 애초에 나 혼자만 좋자고 생각한 일은 아니니까 말야."
"그래서 생각한 게 이거냐? 모처럼 놀러 나왔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등산이라니, 너무하잖냐."
"모처럼이니까 그렇지. 애초에 새해맞이 여행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둘이서 하는 여행인데 어쩔 수 없는 건 또 뭐냐? 마음대로 바꾸면 되잖냐."
"그러면 넌 새해 첫날부터 방에서 늦게까지 잘 거야?"
"나쁠 거 있냐? 어차피 쉬는 날인데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냐? 등산은 또 뭐고?"
"왜, 너도 한 번쯤 같이 산에 오르겠다며? 그걸 내일 하자는 건데 뭐가 문제야!"
"그걸 말도 없이 정하는 게 문제라는 거지! 다 니 마음대로 정해 놓고 전날 밤에 통보하면 어쩌라는 거냐?"
 
 분명 싸우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소한 입장 차로 시작한 갈등은 거듭될수록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첨예해질 뿐,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선 몇 마디가 오가는 동안 이틀 간의 행복한 여행 계획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동시에 직감하면서도 둘 중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백 일이 넘는 기간 동안 함께하며 여러 면에서 부딪혔다 화해하기를 반복했던 만큼 이제는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갈등도 조금 더 매끄럽게 해결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건만. 그것이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그야말로 최악의 형태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한숨부터 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돌이킬 수 없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어느 한 쪽이 양보하면 그나마 쉽게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 역시 눈치챈 쇼우네이가 언성을 높이던 것을 멈추고 잠자코 미노루의 답을 기다렸다. 미노루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미노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쇼우네이의 예상을, 아주 나쁜 쪽으로 완전히 뛰어넘었다.
 
"몰라, 그냥 네 마음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휙 돌아서 어느새 저만치 가 버린 미노루를 쇼우네이는 한참 동안이나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잘 수습해 보려는 기특한 생각까지 해 줬는데 그것도 모르고 돌아서다니. 머릿속이 정리되자 미노루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떠오르며 그 말의 주인공이 원망스러워졌다. 원망을 품기 시작하니 미노루가 잘못한 것이 점점 크게만 보였다. 제멋대로 저를 얼음이 미끄럽게 얼어 있는 겨울 산행에,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끌고 가려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잘 해 보려는 마음도 모르고 화만 내는 미노루가 이제는 원망을 넘어 야속하기까지 했다.
 미노루라고 해서 제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미노루의 계획은 쇼우네이와의 상의를 한 차례도 거치지 않았고 쇼우네이의 취향도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계속 설득하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쏘아붙이고 돌아서기까지 한 몇 분 전의 자신을 책망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물론 미노루가 화가 난 데도 이유는 있었다. 일 년 중 어쩌면 가장 특별한 날을 가장 사랑하는 쇼우네이와 함께 의미 있게 보내려고 나름대로 계획한 일정을 쇼우네이 본인으로부터 거절당했으니 말이다. 일 년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쇼우네이와 함께 보내고 싶어서 애써 계획을 세우고 일을 빠르게 마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섬 밖으로 나온 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던 쇼우네이를 생각하니 다시금 부아가 치밀었다. 제 계획에 토를 달던 모습을 곱씹을수록 쇼우네이에 대한 괘씸함이 미안한 마음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같이 등산 한 번 해 주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슬그머니 돌아본 쇼우네이는 어느새 몇 걸음 떨어진 채 미노루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에 눌러 두었던 서운함이 빈틈을 파고들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해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기를 삼십 분째다.
 사실 둘의 갈등은 일시적인 말다툼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좁혀지지 않는 취향 차이 때문이었다. 미노루에게 새벽 다섯 시 기상은 그리 문제되는 일이 아닌 반면 쇼우네이에게 다섯 시 기상이란 별나라 이야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외출을 싫어하는 미노루는 딱 하나, 산에 오르는 것만은 좋아했고 외출을 즐기는 쇼우네이는 등산만큼은 피하려 했다. 쉬는 날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를 즐기는 쇼우네이와는 달리 미노루는 새해 첫 날은 꼭 산행으로 시작해 일출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처럼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운 둘 사이에서 갈등 없는 평온은 곧 끊임없는 이해와 양보를 뜻했다. 달리 말해 누구 하나가 물러서지 않으면 바로 부딪히고 말았다. 지금의 다툼 역시 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구 하나 먼저 굽히고 들어가지 않던 탓에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던 냉전은 건물 폐쇄 시간이 가까웠다는 안내 음성이 울려퍼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좁은 엘리베이터 내에서도 한 쪽 끝과 다른 쪽 끝에 서서 애써 거리를 유지하던 둘은 미노루가 예약해 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한두 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손은 잡지 않았다. 늘 손을 잡아 주던 쇼우네이 대신 다닥다닥 붙은 가로등 불빛과 도시의 소음이 미노루를 아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주었다.
 
 숙소에 들어온 뒤에도 선뜻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힘들었다는 가벼운 투정으로 시작해 그래도 즐거웠다든가, 내일이 기대된다든가, 하다못해 먼저 씻으라는 말이라도 했을 터였건만 이상하리만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인용의 작은 방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떨쳐 보려는 듯 미노루가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텔레비전 화면 하단의 자막은 밤 열한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해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탓인지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목소리에는 한껏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그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도 축 처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텔레비전의 내용에는 관심도 없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배경음악으로는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소리로 정적을 쫓던 것도 잠시, 돌연 텔레비전이 뚝 꺼지며 미노루의 언짢은 얼굴이 검은 화면에 비쳤다. 시선을 돌려 보니 어느새 리모컨을 집어 든 쇼우네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쇼우네이 또한 미노루와 마찬가지로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껏 찡그린 쇼우네이가 톡 쏘아붙이며 말을 꺼냈다.
 
"지금 티비가 눈에 들어오냐?"
"그냥 틀어 놓는 건데 왜."
"그 전에 할 말 있지 않아?"
"……."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하자. 몇 초간 망설인 끝에 미노루가 내어 놓은 대답이었다. 매끄럽지 못한 마음을 품고 이야기를 해 봐야 더 큰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말을 끝으로 쇼우네이가 든 리모컨을 가로채듯 가져간 미노루는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비록 몇 초 후 다시 리모컨을 가져간 쇼우네이의 손에 다시 꺼졌지만 말이다.
 
"너는 이럴 때마다 자꾸 피하더라? 그래서 해결될 것 같냐?"
"지금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뭐가 되긴 해?"
"그러면 다시 돌아갈 때까지 이러다 갈 거냐?"
"……."
 
 쇼우네이의 한 마디에 미노루가 더는 입을 열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미노루 또한 기껏 온 여행지에서 싸우기만 하다 돌아가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미노루가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고 쇼우네이가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간에…… 적당히 끝내자고. 아까 화낸 건 미안했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잖냐. 내일 아침은 같이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단 말야."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기는 하냐. 말끝을 흐리며 덧붙인 쇼우네이는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괜히 목을 긁적였다. 쇼우네이가 머뭇거리며 겨우 꺼낸 한 마디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던 미노루의 마음이 우습게도 조금 풀려 버렸다. 말하자면 쇼우네이도 미노루도 함께하는 여행을 고대한 나머지 물러설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셈이었다. 미노루 또한 쇼우네이와 다르지 않았다. 제 계획에 쇼우네이가 반대할 것을 알면서도 한 치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미노루 역시 쇼우네이만큼이나 이 하루를 기다려 왔던 탓이다.
 결국 둘의 말다툼은 둘의 취향이 달랐기 때문임과 동시에 둘이 원하던 것이 근본적으로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달랐을 뿐, 둘 모두 연인과 보내는 특별한 하루를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그리고 몇 주나 손꼽아 기다렸기에 그것이 좌절될 때의 실망이 컸던 것이다. 새벽부터 함께 산에 올라 바라보는 일출도, 밤이 늦도록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다 맞는 여유로운 아침도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서로를 상처입히다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 시작한 원흉은 그토록 특별한 여행을 제멋대로 진행하려던 미노루였다. 비로소 제 잘못을 온전히 깨달은 미노루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미안. 너랑 같이 특별한 새해 첫 날을 맞고 싶었던 건데 욕심이 과했나 봐. 네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
"……."
"어쨌든…… 나라고 한 해를 싸우면서 끝내고 싶은 건 아니었어. 알고 있지?"
 
 쇼우네이의 말 없는 끄덕임을 끝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다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쇼우네이도 미노루도 내심 새해 첫 시간을 냉전 상태로 보낼까 봐 마음을 졸였는지 너나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미노루가 조심스레 몸을 웅크려 쇼우네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엷은 심장 박동이 쇼우네이에게서 미노루에게로 나지막이 전해져 왔다. 작은 울림 같기도, 소리 같기도 한 쇼우네이의 고동에 귀를 기울이니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며 나른하게 힘이 빠졌다. 일을 서둘러 마치고 마지막 배로 섬 밖의 도시로 나온 것도 모자라 쇼우네이와 다투며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다 소모하기까지 했으니 피로가 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씩 힘이 풀리려는 몸을 일으켜 세운 건 벽시계를 흘긋 본 쇼우네이의 한 마디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
 
 그 새된 소리에 미노루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벌써 열한 시 삼십 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른 씻고 나오라며 쇼우네이를 부랴부랴 욕실에 밀어넣은 뒤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한 해의 마지막 순간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편안하게 맞고 싶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씻고 나오니 시계는 열한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대충 말린 뒤 불을 끈 미노루가 이미 침대 한 쪽에 자리잡은 쇼우네이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쇼우네이 옆자리에 눕고 나니 폭신한 이불의 감촉과 함께 쇼우네이의 온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몸을 조금씩 덥혀 주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손에 리모컨을 들고 있던 쇼우네이가 재빨리 텔레비전을 켰다. 둘은 화면 하단 자막이 가리키는 시간이 열한 시 오십팔 분에서 오십구 분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이윽고 미노루가 쇼우네이의 품에 완전히 파고든 모양새가 되었다.
 어느새 새해까지 십 초만을 남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나지막이 시작된 진행자의 카운트다운은 자정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소리를 높여갔다. 마침내 일, 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운트다운은 끝이 났고, 새로운 해가 찾아왔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둘의 시선은 동시에 서로에게로 향했다. 텔레비전 화면 너머의 사람들이 새해를 기념하며 떠들썩하게 소리를 높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둘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작은 미소가 점점 번지더니 어느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조차 모르면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한참을 웃어대며 실없는 소리를 하던 중 쇼우네이의 입술이 몇 번쯤 미노루의 볼 위로, 또 목 위로 내려앉기도 했다. 어느새 텔레비전은 뒷전이었다.
 몇 분이 더 흐르고 나서야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쇼우네이가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버튼 하나를 누르자 수많은 인파를 비추던 화면이 순식간에 암전되며 떠들썩한 소리도 저 너머로 사라졌다. 비로소 완전한 고요와 어둠이 찾아왔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미노루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겨울에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건 초심자에게는 조금 위험하겠다 싶어."
"……그래서?"
"케이블카 타고 가자. 그러면 조금 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될 거야. 괜찮지?"
"안 간다고는 안 하는 거냐아……."
 
힘 없이 한 마디 덧붙이면서도 그리 불만스러운 기색은 묻어나지 않는 쇼우네이의 말에 미노루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몇 분쯤 지났을까, 웃음기가 완전히 잦아든 뒤 미노루가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우리 오늘은 싸우지 말자."
"설마 또 그러겠냐."
"그리고…… 우리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만 싸우자."
"너 하는 거 봐서 결정할 테니 잘 해라?"
 
 알았어. 그리 덧붙인 미노루가 쇼우네이의 가슴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집에 있는 거대한 인형마냥 쇼우네이를 껴안은 미노루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쇼우네이…… 사랑해."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미노루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감았다. 나도, 라는 쇼우네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도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본 뒤 신사에서. @Ryu___CM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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