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제목추천좀

이가미 2021. 11. 30. 02:06
 하루를 살아도 알차게 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말처럼 같은 시간에도 밀도 차라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미노루의 경우만 보아도 그랬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허투루 사용하는 시간 없이 바삐 일하기도, 다른 어떤 날은 원 없이 잠을 자다가 노을이 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눈을 뜨기도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한결같이 게으르게 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결같이 성실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평소 그의 행실은 제법 들쑥날쑥했다.
 그런 미노루의 근 몇 달간은 어느 누가 보아도 밀도 높은 나날이었다. 모두 그의 연인 아카츠키 쇼우네이로 인한 결과였다. 미노루는 쇼우네이와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원래부터 바삐 지내던 평일에는 억지로 시간을 비집어 냈으며 한가로이 보내던 주말마저 스스로 반납하고 쇼우네이를 만났다. 자고 싶다는 말을 입에 살던 그답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쇼우네이를 만나지 않는 시간에는 전화를 하고, 생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메시지까지 쳐 가면서 그나마의 자유 시간을 할애했다. 그런 미노루를 지켜보는 가족 모두가 어리둥절할 만큼이나 말이다. 정작 미노루 본인은 쇼우네이에게 정신이 팔려 가족들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세 달이 훌쩍 흘렀다.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목욕탕 계산대 옆에 걸린 커다란 글씨의 달력을 한참 동안이나 빤히 들여다보던 미노루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카츠키 쇼우네이와의 연애를 시작한 지 구십구 일째. 달리 말해 그가 쇼우네이에게 빠져 정신을 홀랑 빼 놓고 지낸 지 구십구 일째 되는 날이었다. 하루가 더 지나면 백 일이었다. 백 일, 이 얼마나 간결하도고 깨끗한 울림이란 말인가. 쇼우네이와 저의 관계가 백 일째를 맞이하리라는 사실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그는 눈앞에서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백 일, 백 일……이라며 중얼거렸다. 저기요, 라며 정신을 일깨우는 손님의 한 마디에 놀라 더듬거리며 계산을 마친 뒤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날이 그들의 백 일째라는 사실만이 가득했다. 일을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첫 연애 탓에 마음이 들뜨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갑작스레 밀어닥치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견디기에 그간 미노루가 쌓아 온 자제력의 둑은 약하기만 했다. 쇼우네이를 마주할 때면 좋고 눈앞에 없으면 보고 싶었으며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릴 때마저 귀엽고 다툴 때는 주체할 수 없이 밉다가도 마음이 풀리고 나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그 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했으니 제정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기적일 따름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삐걱이며 겨우 계산을 마친 미노루가 계산대 아래 서랍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서랍 안에는 분홍빛 장미 꽃다발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것이 인기 있는 꽃인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아름다운지, 꽃말은 무엇인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지만 쇼우네이의 눈 색이 떠오른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사 버린 꽃다발이었다. 백 일째 되는 날 쇼우네이의 품에 안겨주기 위해 준비한 꽃다발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소담스레 핀 모양이 퍽 만족스러웠다. 서랍을 찔끔 열어 그 안에 무사히 놓인 꽃다발을 흘긋 바라보던 미노루의 귀에 조금 전 계산을 마친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어왔다.
 
"있잖아, 내 남자친구 말인데……."
 
 손님의 말에 미노루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즈음의 미노루는 평소에는 듣지도 않던 연애 이야기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처음 해 보는 연애는 필연적으로 서툴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던 미노루는 그야말로 풋내기였다. 그런 미노루에게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어떻게 해야 상대가 저를 더 마음에 둘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싸울지, 원래 연애라는 것이 이토록 설레면서도 피곤하고, 행복하면서도 때로는 괴로운 것인지. 그쯤 되니 연애 이야기를 꺼내는 모든 사람이 연애 선배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만 싶은 심정을 꾹꾹 눌러참기만 하던 그는 자연히 다른 이들의 연애사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미노루는 여전히 귀를 쫑긋 세운 채 손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만나는 날을 조금 줄여야 하나 싶어."
"왜? 죽고 못 살더니."
"그게…… 걔가 요즘 날 질려하는 것 같아. 너무 자주 봐서 그런가 봐."
"설마, 너희 이제 백 일 조금 지났잖아. 착각한 거 아냐?"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영 티가 나서 말야……."
 
 손님의 말에 미노루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연인 사이에 질리다니.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이야기였고, 그럼에도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였다. 이를 진작 고려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 한들 몇 달을 내리 보면 대부분은 지겨워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쇼우네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유독 싫증을 내는 일이 잦았다. 무언가 제 흥미를 끌면 그 쪽으로 쉽게 이끌리다 금세 질리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노루가 그간 보아 온 쇼우네이의 모습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안 그래도 잠시나마 제 연애 스승으로 점찍어 두었던 손님의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다. 너무 자주 보니 귀찮아한다거나, 만나는 날을 줄여서 애태우기라도 해야 된다든가. 아니면 아예 잠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었지. 마디마디가 미노루의 뇌리에 콕콕 박혔다. 원래 인간이란 황소 저리가라 할 만큼이나 고집스러우면서도 자신 없는 영역에서는 귀가 종잇장처럼 얇아지곤 하는 간사한 생물이다. 어느 누구의 말에도 쉬이 휘둘리지 않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미노루는 손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저와 쇼우네이의 이야기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손님들이 목욕탕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들의 대화는 미노루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어느새 여자친구에게 질리고 만 그 사람이 연애를 한 시간은 백 일 남짓. 그 말대로라면 쇼우네이와 저의 관계도 제법 위태로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 옆에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시시하다는 듯 김 빠진 얼굴을 하는 쇼우네이를 마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손님이 말한 대로라면 그와 같은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만나는 횟수를 조금 줄여야 한다. 여유 시간이 있는데도 부러 만남을 줄이는 것은 고역이겠지만 쇼우네이가 저를 지겨워하는 것보다야 수십 배는 나았다. 내일까지만 만나고 모레부터는 덜 만나자고 해 볼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목욕탕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짤그랑 울렸다. 평소보다 조금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 라는 인사를 건네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미노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쇼우네이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 녀석은 제 생각만 해도 나타나는 것인지. 기가 막히게 모습을 드러내는 쇼우네이를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던 미노루가 몇 초가 지나고서야 왔냐, 라며 가볍게 말을 꺼냈다. 제 시원찮은 반응에 뚱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민 쇼우네이의 표정을 살필 정신조차 없었다. 그런 미노루의 귀에 쇼우네이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너 데리러 온 건데 반응이 그게 뭐냐?"
"아니, 그게……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일하느라 바쁘다던 건 언제고 잡생각이냐…… 아무튼 금방 끝나지? 저기 앉아서 기다린다?"
"……응."
 
 미노루는 탈의실 문 앞의 평상을 가리키며 묻더니 제 답도 듣지 않고 털썩 앉는 쇼우네이를 눈으로 쫓았다. 여느 때와 같이 쾌활하고도 가벼운 얼굴이지만 자세히 보니 미약하게 피곤한 티가 났다. 어쩐지 안색도 그리 좋지 않은 듯 보였고 눈 밑에는 다크써클까지 내려와 있는 모습을 보니 쇼우네이도 적잖이 지친 듯싶었다. 무엇 때문에 지친 것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매일 아침마다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나 함께 등교하고 밤마다 저를 데리러 늦은 시간에 목욕탕으로 오는데다 주말까지 반납하니 그리 되었겠지. 그러잖아도 쇼우네이를 혹사시키는 것 같다는 양심의 가책은 늘 있었다. 사람은 몸이 힘들면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곤 하는 법이다. 제게 지친 이상 질리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깊어지는 수심을 누르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일 꽃만 전해 주고 쉬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서랍을 열어 꽃다발을 한 번 더 확인하려는데, 어느새 미노루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쇼우네이가 한 마디를 꺼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냐? 땅 꺼지겠다."
"아…… 별 거 아냐."
"그건 그렇고 뭘 그렇게 보냐? 나도 좀 보자."
"야, 안 돼…… 저리 가……."
 
 원래 백 일 기념 꽃다발 같은 건 상대가 미리 알면 재미없는 물건이었다. 계산대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쇼우네이를 양 팔로 밀어내던 미노루의 반응에 쇼우네이가 못 이기는 척 한 발 물러났다.
 
"웬 건데 그렇게 숨기냐?"
"……몰라도 돼."
"반응이 왜 그래? 나 몰래 다른 사람 줄 거라도 되냐?"
"그런 건 아닌데……."
 
석연찮은 기색을 띠며 저를 밀어내던 팔을 거두는 미노루의 모습에 쇼우네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지금 불만이 있다, 라며 말 없이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었다. 이를 모를 미노루가 아니었건만,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갖가지 생각에 정작 제 눈앞에 있는 쇼우네이에게 신경 쓰지 못한 미노루는 쇼우네이가 보내는 비언어적인 신호를 놓치고 말았다. 평소대로라면 제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칠 때마다 달래 주거나 하다못해 건성인 말투로나마 왜 그러냐고 묻던 미노루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쇼우네이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쇼우네이가 톡 쏘듯 미노루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러냐? 얼빠진 얼굴로 서 있질 않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대더니 이제는 감추기까지 하고."
"진짜 별 거 아니라니까 그래……."
"별 거 아니면 말 못 할 건 또 뭐야? 전에 네가 그랬잖냐. 널 믿으면 뭐든 간에 말해 달라고. 이제 와서 나를 못 믿겠다는 거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걸릴 거 없으면 말을 해 보든가."
"……쇼우네이."
 
계속되는 쇼우네이의 채근에 결심한 듯 잠시 입을 열지 않던 미노루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평상시보다 조용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둘의 주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말을 해 보라며 재촉하던 쇼우네이마저 제 예상을 한참 빗나간 미노루의 반응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몇 초간 감돌던 침묵이 둘 사이를 팽팽하게 옥죄었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미노루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당분간 좀 쉬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처럼 자주 만나기보다는…… 조금 여유를 갖고 만나자고."
"그러니까, 지금…… 자주 만나지 말자는 거지?"
"……그래."
 
신기하게도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흔들리던 미노루의 눈빛이 어느덧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그와 달리 쇼우네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을 되묻다못해 미노루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기까지 하던 쇼우네이가 그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수십 초의 시간이 걸렸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미노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쇼우네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대체 왜?"
"……우리 둘을 위해서야."

 

우리 둘을 위해서라니, 쇼우네이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누구 멋대로 둘을 위해서라는 말인가. 적어도 저를 위해서는 아닌 것 같은 그 말을 꺼낸 미노루의 얼굴은 조금 기운이 없는 듯도, 평소처럼 차분한 듯도 했다. 연애를 시작한 뒤로 미노루의 속내는 쉬이 들여다보았다고 자부해 왔건만. 지금처럼 아리송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둘을 위해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원래 약간은 시간적 간격을 두는 게 서로에게 좋아."
"좋긴 뭐가 좋아, 나는 싫거든?"
"너무 그러지만 말고 잘 생각해 봐."
"뭘 생각해 보라는 건데?"
"너 스스로도 알 거 아냐. 지금처럼 일정을 소화하는 건 무리라는 거. 너 되게 피곤해 보이는 거 알아? 아침부터 밤까지 나랑 있는 것도 모자라서 통화까지 하니까 그렇겠지."
"또 그 소리야? 그런 이유로 피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몇 번이고 추궁하는 쇼우네이에게 사실대로 말해 볼까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가장 잘 통하고 뒤탈이 없다는 것이 미노루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만큼은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이미 저를 지겨워하고 있을지 모르는 쇼우네이가 제가 질렸냐는 말을 듣고 정말로 질리기 시작했음을 의식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앞으로 보지 말자는 건 아냐. 그냥 지금보다는 조금 줄이자는 얘기지."
"그러다 점점 더 줄이자고 하게? 나랑 만나고 싶긴 해?"
"왜 얘기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는데."
"그게 아니면 이럴 이유가 없잖아. 니가 힘든 거면 말을 제대로 하든가."
 
 말다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백 일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처럼 과열될 줄은 예상치 못한 미노루가 흘끔거리며 쇼우네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를 알 리 없는 쇼우네이는 어느새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미노루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미노루의 입에서 뭐라 말이 나오기도 전에 쇼우네이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감추기냐? 됐어, 나도 이런 걸로 시간 낭비하기는 싫거든? 그러니까 먼저 간다."
"아니, 쇼우네이, 잠깐만,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게……."
"나중에? 너무 늦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쇼우네이가 홱 등을 돌려 나갔다.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젖힌 쇼우네이 탓에 출입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당장에라도 깨질 듯 날카롭게 찰랑였다. 달려가 붙잡으려 했지만 어느새 쇼우네이는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조금이나마 남은 일을 끝마치기 위해 터덜터덜 계산대로 돌아온 미노루가 다시 한 번 밑의 서랍을 열어 꽃다발에 눈길을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던 꽃다발이 더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 이후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만큼이나 정신없이 지나갔다. 무얼 하든 미노루의 마음 한 구석에는 쇼우네이의 말이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못내 신경 쓰였다. 마치 두어 달쯤 전의 상황을 다시금 마주하는 듯한 기시감에 미노루의 마음 속에서 불안감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다시 그 때처럼 크게 싸우다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서 드물게도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잠이라도 잔 뒤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잠이 오지 않는 탓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한참이나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미노루는 협탁에 놓아 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열한 시.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쇼우네이는 잠들지 않았을 터였다. 이 즈음에는 늘 저와 함께 밤거리를 걷거나 통화를 했으니 말이다. 미노루는 두 손을 뻗어 느릿느릿 자판을 쳤다. 집 앞 공원. 기다릴게. 짧은 두 문장만을 남긴 미노루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현관 밖으로 나온 미노루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비단 갑작스레 들이닥친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쩐지 몇 달 전의 일이 다시금 반복되는 듯한 기시감이 또 한 번 미노루의 온몸을 휘감았다. 분명 그 때는 조금만 걸어도 땀이 배어나오던 여름이었는데 계절이 돌고 돌아 겨울이 되고서도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있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또 하나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 손끝에 커다란 쇼핑백의 손잡이가 쥐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에는 낮에 사 둔 꽃다발이 조심스레 담겨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 꽃다발을 쓸 일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전기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듯 아찔한 느낌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털옷을 여민 미노루는 공원을 향해 세찬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밤에 혼자 공원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다. 처음은 쇼우네이의 고백을 회피했던 날, 두 번째가 지금이었다. 아마 그 때도 제 잘못 때문에 쇼우네이의 속을 상하게 했었지. 그 때나 지금이나, 한밤중의 공원 한복판에 홀로 서 저를 감싸는 밤하늘의 무거움에 짓눌리는 것이 제게 주어진 응당한 벌 같았다. 같은 일도 두 번 반복하니 여유가 생긴 것일까, 미노루는 몇 개월 전처럼 돌아갈지 말지 몇 번이고 망설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대신 조용히 놀이터로 향했다. 몇 달 전 몸을 기대었던 작은 돔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심스레 돔 안으로 기어들어가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여름에도 찬 느낌이 없지 않던 돔 벽에 몸이 닿으니 피부가 찌릿하게 아려 올 정도로 추웠다. 전처럼 잠에 빠져드는 것마저 허락지 않는 날씨 탓에 미노루는 또렷한 정신으로 쇼우네이를 만나서 할 이야기를 되짚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답이었다. 제 이야기로 자각할 감정이라는 건 애시당초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이를 언제 마주한들 다를 것은 없었다. 조금 더 먼저 비참해지느냐 마음을 졸이며 미루냐의 차이였을 뿐.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쇼우네이를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꽃다발을 전해 줄 수 있다면 더 좋고. 마음을 정리하니 뿌연 안개라도 낀 듯 탁하던 마음이 맑게 개어 왔다. 쇼우네이를 만날 준비는 얼추 끝이 났다.
 문제는 쇼우네이가 나와 주어야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쇼우네이는 미노루가 알던 것보다도 겁쟁이였다. 두 달쯤 전에도 쇼우네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크게 싸웠는데, 어째 실수를 하면서도 배우는 것이 더디다. 그런 저를 잠시 원망하며 미노루는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제게 단단히 화가 난 쇼우네이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들어 제 메시지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가만히 앉아서 쇼우네이 생각을 하니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털옷을 뚫고 몸 속으로 스몄다. 시간이 흐를수록 추위에 손끝과 발끝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차다못해 따끔거리며 아프기까지 한 손을 입김으로 녹이던 것도 잠시뿐, 점차 추위에 온몸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졸음이 왔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눈이 감기려던 그 때였다.
 
"여기서 뭐 하냐?"
 
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노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쇼우네이였다. 몇 달 전,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는 한참을 기다리다 잠까지 들고서야 만날 수 있었던 쇼우네이가 그 때보다는 빨리 저를 찾은 것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얼굴 근육마저 굳어 어버버 더듬거리기만을 반복하던 미노루를 흘긋 내려다본 쇼우네이가 귀에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쯧, 하고 혀까지 한 번 찬 쇼우네이가 입을 열었다.
 
"바보같이 이 겨울에 밖에 나와 있냐……."
 
멍청하게 여기서 웅크리고 있을 줄 알았다. 말은 그리 하면서도 몸을 한껏 쭈그린 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오는 쇼우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화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화가 났대도 보통 사람이라면 가장 사랑하는 제 연인이 추운 겨울에 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사실 앞에서만은 분이 조금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쇼우네이 또한 그랬다.
 
"그래서, 갑자기 왜 나오라고 한 건데."
"어, 그게……."
"바보 같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멍청해졌잖냐. 정신 좀 차리고 있지."
 
쇼우네이가 얼어붙어 부자연스럽게 굳은 미노루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언 피부에 따뜻한 손이 닿으니 갑자기 피가 흐르며 찌릿찌릿한 전류가 피부 밑을 내달렸다. 주머니 속에 핫팩이라도 넣고 온 것일까, 쇼우네이의 손은 따뜻하다못해 뜨겁기까지 했다. 그런 미노루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쇼우네이가 주머니에서 핫팩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어 잘 펴지지조차 않는 손에 억지로 핫팩을 쥐여 주다시피 한 쇼우네이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우리 집으로 가자. 여기 계속 있다간 눈사람 되겠네."
 
 말을 끝낸 쇼우네이가 미노루의 핫팩을 쥐지 않은 쪽 손을 낚아채듯 잡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쇼우네이를 따라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보려 해도 한참을 쭈그려 있던 다리는 저릿저릿하고 발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에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걷던 미노루를 돌아본 쇼우네이가 다시 한 번 잘게 혀를 찼다. 도저히 못 봐 주겠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걸음만큼은 조금 늦춰 주는 쇼우네이에게 미안해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일지 쉬이 감이 오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는 대신 미노루는 할 수 있는 대로 발걸음을 재촉해 쇼우네이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쇼우네이가 미노루를 현관 안으로 들여보내며 뒤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저를 반기듯 훅 끼쳐 오는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몸의 중심부에서부터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한 피부가 간질간질해져 왔다. 쇼우네이는 그런 미노루를 제 방으로 보내고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녹차 한 잔을 준비해 들어갔다. 여느 때였다면 멋대로 제 침대 속을 파고들었을 미노루는 침대의 옆면에 조심스레 기대 앉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을 하라던 건 언제고 저는 멋대로 감추더니, 한밤중에 난데없이 저를 불러내고는 끝끝내 만나서도 제 눈치를 보는 모양새라니. 그런 미노루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난 건지, 답답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쇼우네이가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미노루 옆에 앉았다. 녹차 한 잔을 건넨 쇼우네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래서, 왜 그렇게 무식하게 날 불러낸 건데."
"말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전화라도 걸지 그랬냐……."
"안 받을 것 같아서."
 
미노루의 말에 쇼우네이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받지 않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적당히 고개를 주억이던 쇼우네이는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미노루가 말을 이어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에 응하기라도 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노루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아무튼……. 미안하다. 너를 불안하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말을 아꼈네."
"……."
"별 이유는 아니었어. 그냥 나도 조금…… 불안했거든."
 
담담함을 가장하면서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미노루의 말에 불안한 것은 저뿐인 줄만 알았던 쇼우네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노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 것도 잠시, 이내 다시 입을 삐죽 내민 채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서도.
 
"목욕탕에 있다가 다른 손님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 남자친구랑 매일같이 만났더니 남자친구가 지겨워하는 것 같다던가, 뭐, 그런 내용이었어."
"……."
"그래서 만나는 횟수를 줄이자고 한 거야.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네가 질린다는 감정을 자각할까 봐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
"그래서……."
"응, 그래서야. 만나는 횟수를 줄이자고 한 것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도."
 
생각보다 시시하지? 덧붙이듯 말한 미노루가 쓰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유들이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쇼우네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다툼까지 일으키다니. 저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끌어안은 양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 미노루를 가만히 바라보던 쇼우네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 거였냐. 그게 다라면야, 뭐……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
"나야말로 너 때문에 곤란하다고."
"……?"
 
쇼우네이의 말마디에 미노루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쇼우네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두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쇼우네이였다. 티가 나게 고개를 홱 돌린 그가 중얼중얼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내가 이것저것 손도 많이 대고 지겨워하기도 했었잖냐."
"……그랬지."
"그동안은 마음 가는 데 집중하다 지루해지면 손 떼면 되니까 그런 쪽으로는 편했거든?"
"……응."
 
미노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쇼우네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이 미노루의 눈에도 보일 만큼이나 큰 한숨이었다.
 
"그런데 너 때문에 그게 안 되잖냐. 그동안에는 뭐든 마음대로 하다 잘 안 될 때쯤엔 이미 질려서 미련이고 뭐고 없었는데 넌 다르니까……."
"……."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고, 뭐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되더라도…… 손을 털고 떠날 수가 없어서 곤란하다고. 그래서 네가 날 싫어할까 봐 나야말로 불안하단 말야."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 하면서 내빼지 말고 너야말로 책임지라고. 그리 덧붙이는 쇼우네이를 바라보는 미노루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쇼우네이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노루를 몇 시간이고 괴롭히던 잡다한 상념이 단숨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저 스스로가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조차 모를 허무함에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미노루를 흘긋 바라본 쇼우네이가 완전히 미노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두 눈이 제대로 서로를 마주했다. 분홍빛 렌즈로 한 겹 싸인 눈동자에서도 미노루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것은 쇼우네이가 조금 전 한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그 눈빛에 그리도 마음이 놓일 수가 없었다.
 떠올려 보면 모든 것은 제 억측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쇼우네이에 관련된 일이라면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제가 필요 이상으로 흔들린 탓이었다. 정작 쇼우네이는 말로도 행동으로도 저를 지겨워한다는 신호를 보내 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제 눈앞의 쇼우네이를 조금 더 믿었으면 일이 이토록 꼬이지도 않았을 것을. 그야말로 쓸데없는 고민에 사로잡혀 마음고생을 한 것이 허무하다못해 우습기까지 했다. 미노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미노루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쇼우네이를 향해 미노루가 말을 꺼냈다.
 
"어쩐지 조금 우습네. 이루어지지도 않을 걱정을 하면서 마음을 졸였던 게 말야."
"그래서 나도 고생깨나 했잖냐. 어떻게 배상할 거냐?"
"……그러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노루의 말에 몇 초간 망설이는 듯싶던 쇼우네이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제 입술을 가리켰다. 입을 맞춰 달라는 신호였다. 짧은 입맞춤 한 번이면 하루 동안 했던 마음고생이 전부 녹아내릴 것이라는 자신감마저 엿보이는 그 표정에 미노루가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쇼우네이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나아가 입을 맞추는 것은 여전히 떨리고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해야 할 때였다. 둘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하기를 백 일이나 계속한 연인이었으니.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미노루가 조금씩 쇼우네이에게 가까워졌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은 어느새 감기고, 아주 짧게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한순간의 마법 같은 입맞춤이었다. 어느새 붉어진 얼굴을 한 미노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 백 일째네. 그동안 함께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많이. 그리 덧붙인 미노루의 얼굴은 홍당무마냥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말에 내가 더 많이 좋아하거든? 이라며 응수하는 쇼우네이의 얼굴에도 묘한 붉은빛이 돌았다. 그런 쇼우네이에게 그 이상 무어라 말하는 대신 미노루는 커다란 쇼핑백을 가까이 가져왔다. 미노루가 조심스레 쇼핑백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분홍빛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꽃다발을 커다란 쇼핑백에서 꺼내다니, 그리 멋없기도 어려웠건만 누구 하나 개의치 않았다. 둘 사이의 분홍빛 장미 꽃다발과 분홍빛으로 물든 둘의 미소. 행복이라는 말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지날 정도로 둘은 행복의 한가운데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긴 지 오래일 거다. 발갛게 물든 얼굴을 한 미노루와 만족스러운 표정 뒤로 홧홧한 열기를 감춘 쇼우네이를 둘러싼 시간은 바로 그 순간에도 흐르고 흘러 그들의 백 일째를 장식했다. 그들의 생애 어느 때보다도 꽉 찬 백 일간 많은 일이 있었고, 그 밀도 높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기념일 따위 관심조차 없던 미노루가 백 일째 되는 날을 세면서 들뜰 만큼이나, 꽃은 비실용적이라 선물용으로는 별로라던 미노루가 꽃을 주고받는 기쁨을 알아차릴 만큼이나, 또 자연스레 서로의 집에 들어가 밤을 보내고,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약해지고, 몇 번이고 싸우면서도 그 모든 것이 결국 믿음이 되고 사랑으로 자라날 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분명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미노루인데도 제게 찾아온 그런 변화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백 일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아주 다른 사람일 거야. 쇼우네이에게 들리지 않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노루는 두 팔을 벌려 쇼우네이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22.01.01
영화 연작 - 1  (0) 2021.12.27
제목 짓는 법 삽니다  (0) 2021.11.20
하와와 쇼네쟝 토끼라는거시야요  (0) 2021.11.20
아카시라 짧은 그리움 연작 2  (0) 202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