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후회는 검은빛을 띤다

이가미 2022. 4. 6. 22:39
아카시라(을)를 위한 소재키워드 : 시곗바늘소리 / 후회 / 정장을 차려입고


 오래된 옷에는 삶이 덧대어져 있다. 시간이 흘러 닳고 해어진 부분마다 감정이라 불리는 천이 기억의 실로 수놓아진다. 학창 시절 내내 입은 교복에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스며 있는 것처럼 옷마다 저마다의 시간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검은 정장에 얽힌 건 특별하다. 그 안에 깊이 배어든 건 장례식장의 기억이다. 장례식장 안을 소용돌이치듯 메우는 감정들은 옷 속에도 흠뻑 배어들었다. 슬픔, 울분, 절망, 미련, 회한……. 그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것은 결국 후회다. 후회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다. 살아생전 못다 한 말, 상처를 주었던 일, 미처 함께하지 못했던 순간에 대한 후회가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여러 갈래의 감정으로 퍼져나간다. 죽음이라는 혼란 앞에 여러 형태로 분출되던 감정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회라는 말로 갈무리되기 마련이었다. 감정에도 색이 있다면 후회는 여러 어두운 색들을 한데 섞은 색을 띠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는 검은빛을 띤다. 아마도 검은 옷을 입고 망자를 보내는 이유 또한 각자가 각양의 후회를 입고 있기 때문일 터다. 

 수많은 감정을 내포하는 후회라는 것이 잔뜩 엉겨붙은 탓에 검은 정장을 들어올리는 감각은 유독 묵직하다. 그것을 입을 때면 마치 물에 흠뻑 적신 스펀지를 온몸에 두른 듯 몸이 무겁다. 옷 안에 한껏 스며든 후회를 떨치려 갖은 시도를 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바싹 말려 가벼이 하는 것이 그나마의 최선이었다. 본디 후회란 꺼내어 볼수록 그 무게를 더해가는 얄궂은 존재다. 옷에 스며든 후회를 말리는 법은 두 가지다. 첫째, 옷을 입은 뒤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걸어 놓을 것. 둘째, 옷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것. 말로 꺼내어 보면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하다. 한 가지 불행한 점은 여지껏 그것이 성공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곗바늘은 여전히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아직 옷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사정없이 똑닥인다. 후회로 젖은 옷을 말리지 못하는 건 아마도 이 옷을 입고 마주할 상대의 시곗바늘이 멈추었기 때문일 거다. 그 사람의 시간은 어느 순간에 멈추었고, 이 옷 또한 그렇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옷을 가볍게 입어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무거운 정장을 차려입고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어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건만,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내리고 만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가진 후회의 결정체일 거다. 사랑한다는 말을 좋아했는데, 안을 때마다 편안해했는데,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울컥울컥 치밀어오른다. 동시에 다시는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미련이 눈꼬리를 타고 굴러서 떨어져내린다. 떨어져내린 마음은 어느새 검은 정장에 스민다. 옷이 또 축축해지고 한층 더 무거워진다. 

 괴로움을 눌러 삼키고 관에 누일 너의 시신을 마주한다. 핏기 없고 쪼글쪼글한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해 보인다. 너는 흰 옷을 입었구나. 총천연색을 띤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흰색만을 몸에 두른 너를 부러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여전히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정답을 모를 뿐, 내가 어떻게 할지는 알고 있다. 아마도 난 네가 남겨 놓은 모든 아픔을 끌어안은 채 널 사랑할 거다. 사랑마저도 후회로 바꾸어 버린 널 평생 원망하면서도 사랑을 주체하지 못할 거다. 

 어느덧 조문객들이 하나둘씩 걸음하니 아릿한 향 냄새가 식장 안에 감돌기 시작한다. 장례식장에서 향을 피우는 이유 따위 잊어버렸다. 지금은 그저 코끝에 맴도는 향 냄새가 고맙다. 쓰디쓴 후회의 향을 네가 가리우는구나. 그 덕에 숨을 들이쉬기가 조금 편안해진다. 이제야 꽉 막힌 목구멍을 열어젖혀 한 마디를 겨우 꺼낼 수 있겠다. 나지막이 열린 입에서는 물기가 배어든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온다. 
  

"안녕, 잘 가. 사랑해."


부디 이것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기를. 덧붙이는 말은 얕은 온기를 띤다. 그 날이 오면 나 또한 오늘의 괴로움을 벗고 희어지겠지. 속으로 한 마디를 읊조리며, 네가 주었던 행복한 시간들의 답례로 국화꽃 한 송이를 내려놓는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에 맞닿은 그림자  (0) 2022.07.14
세 방울의 사랑  (0) 2022.07.14
...  (0) 2022.02.14
노루끼  (0) 2022.01.21
.  (0)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