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어쩐지 아침부터 우중충하다 했더니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이런 날에는 햇살보다 빗소리가 먼저 창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방 안까지 들어와서 무겁고 축축하게 잠을 깨운다. 그 때마다 나는 괜히 창문을 닫아 빗장까지 건다. 커튼으로 창문을 막는다. 귓가를 때리던 빗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두운 하늘을 핑계로 다시 눈을 감는다. 오 분만......이라며 누구도 듣지 않을 잠투정을 부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간 목욕탕에서는 어린 직원이 죽상을 하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비 오고 추워서 손님이 오려나요......." 그러면 나는 입꼬리에 힘을 줘 아주 살짝, 끌어올린다. 그 작은 입꼬리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무겁게 느껴지지만 억지로 들어올린다. 조금 들어올리고 나면 그 다음은 쉽다. 퍽 뻔뻔스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언제는 손님 많았냐? 일 편하고 좋지 뭐." 그러나 애써 지어 보인 웃음도 금세 씁쓸하게 사그라든다.
비가 올 때면, 온 세상이 차갑고 축축하고 울적할 때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끌어올려지고 만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다며 뻔뻔스럽게 달라붙어 오던 너, 너도 우산이 없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던 너, 같이 가방을 뒤집어쓰고 뛰어가자더니 얄밉게 먼저 달려나가던 너, 그리고 또 너, 너, 너. 그 눈부신 나날의 한가운데 있던 너를 떠올릴 때마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 양 오감이 되살아난다. 온몸을 때리는 차가운 빗줄기, 턱끝까지 차오르던 숨, 발밑에서 철벅이는 물소리, 빗물로 흠뻑 젖은 여름의 냄새, 따라잡힐 듯하면서도 절대로 가까워지지 않던 네 뒷모습까지. 지금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턱 잡으면 꼬맹이 주제에 꽤나 빨라졌다며 키들키들 놀려댈 것 같은 너를 나는 떨쳐낼 수가 없다.
막내 직원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오늘따라 손님도 더럽게 없다. 내 기억 속에 파묻어 두었던 네 모습이 하나도 감춰지지 않는다. 하루종일 나는 네 생각만 했다.
일을 마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있는 곳으로 달리는 동안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산을 챙길 생각도 못 했다. 힘겹다거나 밤하늘이 무섭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때린다. 숨은 턱끝까지 차오른다. 달리는 걸음마다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가 철벅인다. 축축하게 젖은 여름 냄새가 폐 가득히 차다못해 넘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네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 빼면 너와의 추억과 지독히도 닮았다.
한참을 달린 끝에야 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방이 칠흑 같이 어둡고 비릿한 물 냄새가 코를 흠뻑 적시는 곳. 너는 이 바다에 있다. 새카만 하늘과 맞닿아 있는, 어디까지가 끝인지도 모를 새카만 바닷물 속에 네가 있다. 앞다투어 떨어져내리며 아우성치는 빗소리가 네 목소리를 닮은 파도 소리와 섞인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틀비틀 걸어 네가 있는 바닷물 바로 앞까지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엉덩이에서부터 축축한 모래의 한기가 올라온다. 그때서야 나는 지금 춥다는 것을 깨닫는다. 빗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바다는 어둡고 춥다. 네게 인사를 건넬 겨를도 없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온다. 터져 나온 눈물은 삽시간에 번져 나는 금세 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린다.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바닷물을 적시는 눈물만이 뜨거운 건 분명, 내가 차가운 빗물을 맞는 너를 안쓰러워해서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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