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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미션

이가미 2023. 5. 11. 17:53

누구에게나 이상형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간차가 존재할 뿐 모든 이들은 나름의 취향대로 이상형의 모습을 그려나가며, 대개 십 대 초반에서부터 중반 사이에 어느 정도의 모습이 완성되곤 한다.

시라유키 미노루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유독 이성이나 청춘사업에 관심이 없는 미노루였지만 그에게도 막연한 이상형은 존재했다.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자그맣고 말랑말랑해서 포옹할 때 기분 좋은 여자아이. 몸이 닿으면 따스하고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나는 그런 여자애.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처럼 귀엽고 살가운, 그러면서도 점잖은 구석이 있는 애. 눈코입이 어떻게 생겼다거나, 목소리는 어땠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다는 것 정도가 여느 또래 아이들과의 차이점이었지만 취향이랄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이상형의 누군가를 떠올릴 때는 자연스럽게 그와의 연애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주 짧게, 매우 가끔, 스쳐지나가듯 하기야 했지만 미노루 또한 그런 미래를 떠올려 본 적은 있었다. 아마도 서로를 만나는 건 이십 대 초중반 정도. 일이 주에 한 번쯤 만나 서로를 배려하며 점잖은 연애를 한다. 시간을 들여 상대방을 알아가고 많은 대화가 쌓인 끝에 이십 대 후반쯤 결혼을 한다. 미노루가 떠올리는 연애는 항상 사근사근하고 얌전한 모습이었다. 대화와 정신적인 교감이 주를 이루며, 스킨십을 한다 해도 가끔 손을 잡거나 포옹 따위를 하면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정도면 족했다. 무엇보다도, 절대 선은 넘지 않는다. 연인이라고는 해도 그와 자신은 다른 사람이기에 이는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거래처 미팅마냥 예의바르게 격식 차린 연애를 떠올리는 동안 그의 곁에 예기치 않게 성큼 다가온 한 사람이 있었다. 아카츠키 쇼우네이라고 불리는 그는 섬 전체가 한 마을인 아키타와에서, 미노루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남자였다. 키도 미노루보다 크고 몸은 넓고 딱딱했다.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아닌 묵직한 남자 향수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그는 애석하게도 향수 냄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대단히 가볍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다. 꼬리를 살랑이는 귀여운 강아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도리어 컹컹대며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는 늑대 같았다. 점잖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과 미노루 사이에 그어진 -이라기보다도 미노루가 마음 속으로 그어 둔- 선을 마음껏 넘나들었다. 아쉬운 것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조르는 것은 예사 일이었고,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기도 했다. 달리 용건이 없을 때조차 그는 미노루의 옆을 얼쩡거리며 놀려대고 시비를 걸었다. 어릴 적부터 미노루에게 짖굿은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던 그는 그 시절의 버릇을 여전히 못 버리고 속을 박박 긁어댔다.
미노루는 그런 쇼우네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견 사나우면서도 장난기가 묻어나는 얼굴도, 카랑카랑 울리며 놀릴 대상을 물색하는 목소리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콕 집어 장난을 걸던 버릇도, 실속 없는 말을 실없이 던져대던 것도 그랬다. 그런 주제에 늘 주변을 맴도는 것도, 눈가에 밟히는 것도, 어느새부턴가 정신을 차려 보면 시선이 먼저 그를 쫓고 있는 것도 싫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만의 화살은 점차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가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지다못해 어느새부턴가 그가 없는 미래를 쉬이 그리지조차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속 빈 강정마냥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다가도 때때로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금방이라도 아키타와에서 자취를 감출 것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말할 수 없이 아려 오는 자신이 바보 같고 싫었다. 그가 잠시만 눈에 띄지 않아도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눈으로 그를 찾는 저의 모습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저의 모습은 바보 천치가 따로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늘 옆에 있는 쇼우네이가 익숙해지다못해 삶에 깊이 스며들어 그에게 휘둘리기만 했던 것 같다. 이상하게 그의 앞에만 서면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리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밀어내다가도 못내 아쉬워 끌어당기고, 그러다 너무 가까워졌다는 위기감이 들면 또다시 밀어내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무엇 하나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늘 실실거리며 저를 놀려대는 그가 없으면 묘한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지면 어쩐지 거리를 둬야만 할 것 같다는 경각심이 드는 것도 그랬다. 그러다 마침내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을 때, 미노루는 학교를 조퇴했다. 쇼우네이가 들어올 창문을 열고 잤다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졌다는 이유였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일련의 사건 끝에 미노루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을 뛰던 자신싀 복잡한 마음을 사랑이라 정의내렸다.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쇼우네이와의 연애는 그가 익히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토록 자극적인 연애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점잖고 평온하기는커녕 늘 초조하고 휘둘리고 아무튼 바보 같기만 했다. 쇼우네이의 곁에 있을 때면 세포 하나하나, 신경 말단의 말단까지도 깨어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기 바빴다. 그가 저를 부르면 가슴이 제 멋대로 콩닥이기 시작했다. 귀는 어느샌가 열려 그에게로 향하고 고개는 자동으로 그를 향해 돌아갔다. 얼굴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었고, 손발은 기대감에 꼼지락대며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날마다 이런 꼴이었으니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날도 그랬다.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하굣길이었다. 8월 말경이었지만 채 가시지 않은 여름이 여전히 존재감을 뽐내던 날이었다. 한낮을 넘긴 오후인데도 햇볕은 쨍쨍하다못해 뜨거웠고, 때를 놓친 매미 두세 마리가 찌르르 울어댔던 것도 같다. 분명 여느 때와 같았건만. 쇼우네이가 미노루에게로 손을 뻗어 온 그 순간, 미노루의 눈앞에는 평소와는 아주 다른 하굣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쇼우네이는 저 또한 연애가 처음이면서 능청스럽게도 미노루의 손을 잡았다. 마냥 장난스러워 보이는 그와는 달리 미노루의 감각 기관들은 일제히 깨어나 비상 사태를 울려댔다. 눈은 크게 뜨이고 온몸의 피가 팽팽 도는 듯 옅은 현기증이 일었다. 잡힌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온 땀구멍에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숨은 가빠오고 두 뺨은 뜨겁게 익다못해 홍당무가 되어갔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청각이었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전해진 쇼우네이의 고동이 혈관을 타고 올라와 귓가에까지 닿아 쿵쾅쿵쾅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쇼우네이에게도 뚜렷이 들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미노루가 쇼우네이의 손에 잡힌 제 손을 쏙 빼 냈다. 손바닥에 고인 땀 때문에 어렵지 않게 빠진 손을 슥 보던 쇼우네이가 이내 얼굴을 불만스럽게 구겼다. 투정부리듯 그가 한 마디를 톡 내뱉었다.

“뭐야, 싫은 거냐?”
“아니, 그게…….”
“그게, 뭐?”
“........”

몇 초간이나 대답이 없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쇼우네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찌나 빤히 보는지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 같아 그만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저의 반응에 빈정이 상했는지 쇼우네이가 흥, 하고 토라진 듯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시선도 미노루 쪽이 아닌 앞을 향한 채였다.

“싫은 거면 됐다?”
“아니라니까…….”
“아니면 뭔데?”

쇼우네이가 다시금 제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불만스럽게 뜬 가자미눈이 마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말 안 하면 진짜 삐친다? 그런 뜻을 품은 것만 같았다. 겨우 쥐어짜내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노루가 입을 뗐다.

“그게…… 심장 소리가……”
“.......?”
“시끄러워서…… 너는 안 들려?”

겨우 한 마디 내뱉은 것이 무색하게도 미노루가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감정이 적잖이도 과열되어 있었나 보다. 우물거리던 말투는 어느새 작게 쏘아붙이듯 변해 있었다. 그보다도 미노루를 놀라게 한 것은 말의 내용이었다. 심장 소리가 시끄럽지 않냐니, 가슴이 콩닥댄다고 고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놀림당할 게 뻔했다. 입을 닫은 미노루가 쇼우네이를 흘끔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쇼우네이는 또다시 몇 초간 말이 없었다. 그가 뭐라도 반응을 보이길 기다리던 것도 잠시, 이내 쇼우네이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어찌나 경쾌하게 웃어대는지 잔뜩 열이 올라 있던 게 허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쇼우네이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키들거렸다.

“바보 같기는. 뭐가 들린다는 거냐?”
“진짜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달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모를 투로 툭 내뱉은 쇼우네이가 장난기 어린 몸짓으로 미노루의 손을 잡아챘다. 이러면 소리가 들린다는 거 아니냐? 얄밉게 한 마디 덧붙이기까지 한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갔다. 미노루는 여전히 쇼우네이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한 쪽 손만 잡혀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콩닥, 속삭이듯 작은 맥박이 쇼우네이의 귓가에 닿았다. 자신의 것과는 박자가 다른 박동이었다. 콩닥, 콩닥.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한 소리는 떠날 줄 모르고 쇼우네이의 귓가를 간질였다. 자신의 맥박과 교차하며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울리기를 반복하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미노루의 심장 소리였다. 조금 전까지도 미노루를 놀려대던 것이 거짓말처럼 쇼우네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심장 소리가 여과 없이 드러낸 미노루의 마음은 차마 함부로 놀릴 수 없을 만큼이나 커다랗고 무거웠다. 늘 무미건조하던 그 얼굴로, 단조로운 모노톤의 목소리로 그는 남몰래 저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부풀다못해 터져나오던 마음이 심장 박동으로 울리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엿본 미노루의 마음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비밀스럽고 달콤한 색채를 띠었다.
어느새 하굣길의 두 사람 모두 말을 잃은 채 조용히 걷고 있었다. 터벅이는 발소리로도 가려지지 않는 심장 박동은 여전히 맞잡은 손 사이를 맴돌았다.